citrus님
@citrus_ooo
< CRIMSON LAKE >
*공식AU
매그너스는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짙은 붉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눈에 띄는 자극적인 색상도 모자라 잘록한 허리를 따라 유려하게 떨어진 라인을 본 알렉은 미간을 찌그러트렸다. 다리에 달라붙은 검은색 진과 같은 색상의 끈 없는 로퍼는 평소보다 그를 더 늘씬하게 만들었고, 두툼하게 짜인 검은색 목도리는 몇 번 씩이나 둘러지고서도 늘어져 얇은 목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었다. 계절이 겨울 문턱에 막 닿았을 때에도 두툼한 베이지색 파카를 입고 다니며 연신 춥다, 춥다 노래를 부르던 이가 한 겨울에 걸칠만한 옷은 아니었다.
칼바람이 빌딩을 가르며 내달리는 도시 한 복판에서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로 연신 웃고 있는 매그너스는 알렉이 아는 그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밖으로 나가기 싫다는 이유로 자택을 일터로 만든 매그너스는 손님을 핑계로 알렉을 쫓아내기 일쑤였다. 때문에 번번이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그를 찾아가 차 한 잔을 겨우 얻어 마시고 나왔던 알렉은 눈앞의 상황에 기분이 상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는, 분명. 그랬다. 서운하고 야속했다. 조금 뒤따라 걷다가 얼굴을 살짝 굳히고 말을 걸어야지. ‘어디가요.’하고 자연스럽게. 각지고 큰 눈이 휘둥그레지면 차가워진 뺨을 감싸 녹여준 다음 가까운 호텔로 가서 저 코트를 벗겨버리자. 사람들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동그란 뒤통수를 쫓으며 그 다음을 이어 상상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누구야? 저거.”
매그너스가 멈춰 선 곳은 알렉이 그를 데리고 가려던 호텔의 정문 앞이었다. 앞섶을 몇 번 탁탁 털고 잠겨있는 단추를 확인하며 옷매무새를 꼼꼼히 만진 매그너스가 주위를 살폈다. 알렉은 그의 시선을 피해 재빠르게 몸을 숨기면서도 자신이 왜 숨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어디서든 숨지 않는 사람이었다.
알렉이 모퉁이에 서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얼핏 보기에도 매그너스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힐끔거렸고, 계속해서 두리번거렸다.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서서 연신 발을 움직거렸다. 알렉은 매그너스를 지켜보며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은 길지 않았지만, 발신자를 확인한 매그너스가 잠시 멈칫거리는 모습을 본 알렉의 눈매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 …라이트우드 씨?
“네.”
- …….
“왜요.”
- …먼저 연락하신 분이.
“그래요?”
매그너스가 귀에 대고 있던 것을 떼고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가까이 가져다 댔다.
- 용건 없으시면 이만.
“매정하긴.”
-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네.”
얇은 입술이 꾹 다물리는 게 보였다. 나도 참 중증이야. 알렉이 속으로 혀를 찼다. 매그너스는 알렉의 까칠한 대답에 질렸는지 말을 잇지 않고 묵묵히 있으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어디예요?”
- 그건 왜요.
“보고 싶어서.”
알렉이 그에게 자주 들려주는 고백이었다. 보고 싶다. 마주 앉아 있을 때에도 불쑥 그렇게 말하곤 했다. 매그너스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고양이 털 뭉치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마음이 간지러우면서 동시에 심란했다. 알렉의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는 퍽 어려웠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쪽은 대부분 알렉이었기 때문에 매그너스는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매그너스가 돌아섰기 때문에 알렉은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 무슨 일 있어요?
살짝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알렉은 시큰거리는 코끝을 살짝 긁었다. 매그너스는 여전히 알렉을 밀어내기 바빴다. 그의 관심과 호감을 얻는 일은 알렉에게도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나 종종 알 수 없는 순간에 매그너스는 다정해졌다. 무른 얼굴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모인 작은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어지럽게 춤췄다.
왜 숨어있어야 하지? 가슴이 뛰었다. 몇 걸음이었다. 단지 몇 발자국. 알렉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모퉁이에서 벗어나며 막 한 걸음 내딛었을 때, 그 때였다.
- 잠깐만요.
매그너스의 어깨를 툭 건드린 남자가 그를 돌려세우더니 지체 없이 꽉 끌어안았다.
“매그너스!”
알렉의 외침은 그 주변의 몇몇을 돌아보게 했을 뿐 매그너스에게 닿지 않았다.
- 나중에 통화해요!
다급한 목소리와 일방적인 통보를 남기고서 전화는 끊겼다. 남자는 매그너스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호텔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남자는 매그너스보다 한 뼘이 더 크고 호리호리했다. 알렉은 서둘러 쫓았다.
미술관 마냥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회랑을 지나 데스크와 승강기가 있는 곳을 모두 뛰며 살폈다. 장신의 남자가 로비를 누비며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종종 그가 라이트우드 가의 장남임을 알아 본 이들이 곁눈질하며 수군거렸다. 알렉의 짙은 눈썹이 치솟고 얼굴은 단단하게 굳어 험악한 분위기에 감히 누구도 말을 걸지 못했다.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들고서 매그너스에게 다시 전화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모습을 떠올리자 입이 바짝 마르고 뒷목이 뻣뻣해졌다. 남자의 인상착의는 큰 키를 제외하면 뚜렷이 남은 게 없어, 알렉은 매그너스가 입고 있던 빨간색 코트를 떠올리며 그것을 집중적으로 찾았다. 그깟 코트. 자극적인 색이라고 투덜거렸던 게 우스웠다. 매그너스야 말로 자극 그 자체이지 않은가. 알렉은 욕을 쏟는 대신 매그너스를 불렀다.
“매그너스!!”
알렉의 목소리가 광광한 로비를 울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이제는 그를 아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호텔 안에 있는 모든 이가 알렉을 흘기거나 아예 뚫어지게 쳐다봤다.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직원이 결국 그를 제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매그너스 베인!!”
“라이트우드 씨. 이러시면 다른 손님께-.”
“매그너스!!!”
누군가 알렉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조심스럽게 닿은 손을 세게 쳐내며 돌아섰다. 눈에 들어온 것은 단정한 가르마와 살짝 눌러 옆으로 넘긴 머리카락, 난감한 심정을 고스란히 느껴지는 약간 쳐진 눈썹이었다.
“……저기.”
소리를 따라 시선을 좀 더 내리고서야 겨우 눈이 마주쳤다. 매그너스는 차마 왜 이러냐 묻지 못하고 주변을 살피며 쭈뼛거렸다. 모두가 그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뿌리친 손의 주인이 매그너스라는 것을 깨달은 알렉이 그를 신경 쓰며 조심히 물었다.
“일단, 자리 옮길까요?”
“제발 그러죠.”
매그너스가 재빨리 동의하며 목적지도 없이 앞서 걸었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찾던 둘은 결국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날카롭던 바람이 잦아든 거리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알렉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매그너스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따져 묻는 눈빛으로 알렉을 쏘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여기는 또 어떻게 알고 왔고요.”
알렉은 매그너스의 까맣고 큰 눈도 좋아했지만, 얇고 작은 입술도 사랑했다. 항상 오물거리며 한 두 마디 겨우 들려주던 입술이 팔랑거리는 나비 날갯짓처럼 연신 움직이도 달싹였다.
“라이트우드 씨, 제 얘기 듣고 있어요?”
“언제나, 듣고 있죠. …기다리고 있고.”
“…장난하지 말고. 왜 그렇게 불렀어요.”
“그 남자.”
누구를 얘기하는지 단번에 알아듣기는 했는데, 대뜸 알렉이 묻는 저의를 알 수 없었던 매그너스는 고개를 갸웃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예요.”
“그건 왜요.”
“궁금하기도 하고…, 또 사람을 그렇게 끌고 가면 안 되잖아요.”
“끌고 가요? 누가. 나를?”
“꽉 끌어안고 가던데.”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요.”
“상관이 없다니. 여기 호텔이잖아.”
“그런데 뭐.”
냉정한 태도에 울컥했지만, 알렉은 치미는 분노와 서운함을 가까스로 누르고 순간의 진심만을 그에게 알렸다.
“나는 당신이 위험한 건 아닐까 생각해서.”
슬슬 올라오던 짜증이 약간 누그러졌다. 알렉은 정말로 당황한 모양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흔들리는 눈동자나 건물 안에서의 모습이 그랬다.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던 이가 드물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걱정은 고맙지만, 내가 알아서 해요.”
“누군데요. 말 못할 사람이에요?”
“라이트우드 씨.”
“알렉.”
“…….”
“설마 내 이름을 잊은 건 아니죠?”
매그너스는 알렉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마치 그것을 입에 담으면 큰일이 벌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꺼렸다. 실제로 이름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아무 감정도 의미도 없다면 차라리 쉬웠을 텐데. 그는 이제 아무렇지 않게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샘이 솟듯 얕게 고이기 시작한 감정과 외면하고 떨쳐내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알렉 라이트우드를, 그 이름을 껍데기처럼 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그가 원한 다른 것을 주었다.
“그 사람은 내 아버지예요.”
“……네?”
다소 뾰족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져 크게 뜨인 눈이 깜빡거렸다. 녹색과 갈색이 오묘하게 섞인 눈동자는 잎이 울창한 나무 같았다. 겨울보다 여름에 더 어울리는 남자는 매그너스의 말을 몇 번 더 곱씹더니 상황 파악을 끝내고서는 확인하듯 한 번 더 읊조렸다.
“아버지라니.”
“들어가 봐야 돼요. 급하게 나오느라 제대로 얘기를-.”
알렉의 어깨 너머를 쳐다본 매그너스가 말끝을 흐렸다. 알렉이 그의 시선을 다라 몸을 돌렸다. 매그너스의 어깨를 감샀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알렉을 살피고 있었다.
“아버지.”
“매그너스.”
묵직하고 우아한 억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분명한 경계를 느꼈다. 그가 살짝 앞으로 내민 손에 매그너스가 이끌리듯 다가갔다. 알렉을 스쳐 남자의 곁에 선 매그너스는 어설프게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알렉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시궁창에 처박힌 것처럼 불쾌했다. 웃음은 남자를 위한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내 아들에게 볼 일이 있나.”
“……오늘은 이만 됐습니다.”
“다행이군. 날이 추우면 힘들어 하거든.”
알렉은 그가 팔에 걸치고 있던 캐시미어 머플러를 매그너스가 걸치고 있던 머플러 위에 얹어 두른 후 꼼꼼히 여며주는 것을 지켜봤다. 매그너스는 추위를 심하게 탔다. 부모라면 응당 알고 있을 사실인데 알렉은 그마저도 매그너스를 빼앗긴 것 같아 눈앞이 까매졌다.
“계절에 맞게 입으라고 보낸 옷이야.”
“알아요. 그냥…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마를 짚고 싶은 걸 겨우 참은 알렉이 어렵게 웃었다. 매그너스는 조금 주저하다가 남자의 팔을 조금 두드리고서는 알렉을 향해 반 발자국 다가섰다.
“다리가 조금 불편하셔서…, 오래 서계실 수 없어요. 먼저 가볼께요.”
알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그너스는 좀 더 할 말이 있는지 까만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둘 중 누구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설 것 같았던 매그너스가 알렉을 향해 고개만 삐죽 돌려 나직이 말했다. 신경이 곤두서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적은 소리로.
“……고마워요.”
매그너스가 남자를 부축하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걸음을 떼기 전에 남자가 매그너스의 팔을 살짝 밀어 몸을 바로하고는 알렉을 찬찬히 살폈다. 마른 몸과 불편한 다리로도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는 남자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알렉 라이트우드. 알렉산더 기드온 라이트우드입니다.”
“라이트우드….”
그저 조용히 중얼거렸을 뿐인데 압도당했다.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매그너스는 어딘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알렉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아들의 손을 토닥이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보지.”
매그너스가 알렉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알렉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