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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엉님

@rathnix

< 관계의 유한성 >

요즘 알렉산더에게는 버릇이 생겼다. 남자친구를 생각하면서 작은 함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었다. 검붉은 비로드로 감싸인 상자에는 알렉산더가 소중히 간직해 왔던 반지가 들어 있었다. 이건 그의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것이 아니기도 했다. 아직은.

오후 4시 14분. 남자친구가 도착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알렉산더는 주차장에 차를 대어 놓고 오래도록 운전석을 떠나지 않았다. 우단은 무척 감촉이 좋았다. 지나치게 만져댄 탓에 조금 거칠어졌지만, 함을 쥐고 있노라면 부드러운 느낌에 잡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남자친구를 만질 때와는 달랐다. 그는 연인의 매끈한 피부를 더듬을 때면 하고 싶은 게 넘쳐나서 자제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알렉산더의 남자친구 역시 생각이 많은가 보았다. 알렉산더에게 사소한 습관이 있는 것처럼, 그에게는 주기적으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알렉산더, 역시 우린 맞지 않아요.’

‘나와 함께한다면 결국 당신이 다칠 거예요.’

‘왜 나예요? 당신이라면 나 말고도 얼마든지 상대를 고를 수 있잖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나여도? 정말로?’

그리고 또 뭐랬더라. 알렉산더는 연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알렉산더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라 때문에 안 되겠다고 했다. 처음에 그는 약속한 휴가를 함께 갈 수 없다고 사과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매그너스 베인은, 5개월하고도 3일 동안 알렉산더 라이트우드의 남자친구였던 상대는 자신이 월록이라 그와 헤어져야 한다고 했다.

월록.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아서 왕의 전설에 나오는 사람 아닌가? 그, 멀린 같은. (그는 매지션이었나?) 알렉산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대는 설명을 덧붙였다. 월록은 반은 인간이며 반은 악마이고, 악마가 내 어머니를 강간했기 때문에 태어난 자식이라고. 덧붙여 연인은 알렉산더보다 훨씬 오래 살아왔다며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고. 알렉산더가 천수를 누리며 반백년을 매그너스 옆에 붙어 있을 것이라는 가정과는 별개로.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알렉산더는 예의 반지를 떠올렸다.

‘오늘 반지를 주려고 했는데 이런 분위기로는 안 되겠네.’

월록이고 뭐고, 알렉산더에게는 남자친구가 그를 사랑하는지 아닌지가 더 중요했다. 악마의 자식이라는 말은 도무지 믿기 어려웠지만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게 어쨌단 말인가? 매그너스가 조만간 그를 버리고 화성으로 떠나야 한다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알렉산더는 정말로, 진심으로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매그너스를 보내줘야만 했다. 허나 아니라면.

알렉산더는 매그너스에게 조금 더 매달려 볼 예정이었다.

그는 조금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별을 대비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틈만 나면 헤어지자고 노래를 부르는 연인을 설득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당분간, 사실은 오래도록 매그너스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은근히 고집이 센 남자친구에게 이 관계의 정당성에 대해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지 식음도 전폐한 채 고심했다. (그의 여동생은 또 다이어트를 하는 줄 알고 잔소리를 해댔다) 오늘 그들이 만나기로 한 시각은 이른 저녁, 오후 다섯 시였다. 알렉산더는 분위기를 잡기 위해 일부러 첫 번째 데이트 장소인 식당에서 만나자며 약속을 잡았다. 브런치가 맛있지만 간단히 저녁을 먹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5시를 3분 정도 남긴 시각에 매그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산더는 온화한 오후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연광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스스로를 꾸미고 드러내는데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그너스는 알렉산더를 발견하고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공공장소에서 애정 표현을 꺼리는 남자의 얼굴에 그를 향한 동경과 사랑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서, 알렉산더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일이 일찍 끝나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실에 거짓을 조금 보태, 알렉산더는 매그너스를 불러 맞은편에 앉혔다. 오늘 매그너스는 그가 선물해준 검붉은 셔츠를 입었다. 알렉산더는 맞은편의 남자친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매그너스에게는 붉은 색이 참 잘 어울렸다.

알렉산더는 닭가슴살이 들어간 샐러드를, 매그너스는 매쉬 포테이토가 곁들여진 햄버그를 주문했다.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간간이 매그너스는 알렉산더를 흘끔거렸고, 그는 시선을 눈치 채지 못 한 척 양상추를 휘적거렸다. 첫 데이트 이후 단 둘의 만남에서 대화를 이끄는 사람은 주로 알렉산더였으므로 매그너스는 테이블을 점령한 오묘한 침묵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다. 그런 모습도 마냥 좋았으나 그는 가능한 한 말을 아꼈다.

마침내 디저트가 등장했다. 알렉산더는 점잖게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었다. 달콤한 디저트는 알렉산더 전용이었고, 쌉싸름한 음료는 매그너스가 즐기는 후식이었다. 그런데 매그너스는 더블 샷 에스프레소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알렉산더가 대화의 문을 열자, 매그너스가 노골적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말해준 거, 생각해봤거든요.”

매그너스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알렉산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사람이 사악한 악마의 피를 가졌다니. 그러나 매그너스가 했던 말이 전부 거짓일 리는 없었다. 알렉산더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인을 허무맹랑한 말이나 늘어놓는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왜 웃어요?”

“당신이 귀여워서요.”

“대체, 입만 열면 늘 그런 소리를…….”

“진짜로 귀여워서 웃었는데 그럼 뭐라고 말할까요?”

매그너스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알렉산더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서 그들 사이에 폭탄을 떨어트렸다.

“당신이 월록인 게 내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매그너스는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들을까 불안하다는 양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 근처에 손님이 없음을 확인 한 매그너스는 알렉산더를 돌아보았다. 수 백 년을 살았다고 주장하는 남자는 일곱 살 아이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강의해야 하는 가정교사처럼 비장해 보였다.

“당신은 늙을 거예요. 하지만 난 변함없이 이 모습이겠죠. 지금은 별 거 아니게 들릴지 몰라도 언젠가 당신은 그런, 어쩔 수 없는 차이 때문에 예전처럼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 때가 되면 우린 서로를 상처 입힐 거고요.”

“그리고요?”

“전혀 못 믿겠다는 거죠? 좋아요, 음. 예전에 나한테 그랬잖아요. 당신 부모님이 진지한 상대가 생기면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요.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 친분 있는 가족끼리 모여서 지내는 건 라이트우드의 전통이니까요. 아, 추수감사절도.”

“난 그 전통에 낄 수 없어요. 내 가족은 이돔에 있으니까요.”

이돔이 먼 곳인가? 알렉산더가 무지한 질문을 건네기 전에, 매그너스가 덧붙였다.

“이돔은 악마가 사는 곳이에요.”

“아.”

“제발, 알렉산더.”

매그너스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그의 오른손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얹었다. 제발이라니, 헤어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면 이런 애달픈 접촉은 하지 말아야지. 알렉산더는 냉정하게 생각했으나 소리 내어 항의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매그너스의 손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당신에게 모든 걸 말할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일전에 아버지가 당신을 꼭 보고 싶어 하셨고, 난, 나는……. 당신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요.”

알렉산더는 매그너스의 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물었다.

“그러니까 헤어지자고요? 날 여전히 좋아하는데도?”

둘의 관계를 흔들어놓는 질문은 알렉산더 본인이 느끼기에도 무척 평이하게 들렸다. 매그너스는 덤덤한 어조에 속지 않았다. 화들짝 불에 덴 듯이, 매그너스는 놀라 그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얼마 가지 않아 훌쩍거렸다.

“그래요.”

알렉산더는 무어라 말을 더하려 했지만, 매그너스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도망치는 남자친구, 아니, 전 남자친구의 뒷모습을 멍 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

매그너스에게서 연락이 끊긴 지 나흘이 지났다.

알렉산더의 연애지사는 빈말로도 순탄했다 표현할 수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동급생들이 커밍아웃한 그를 따돌리며 괴롭혔고, 성인이 된 후에는 시답잖은 녀석들에게 걸려 인생을 낭비했다. 그 난리 끝에 만난 상대였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니, 알렉산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해도 그는 매그너스를 다시 설득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뒤돌아 가버리는 남자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왜냐면 매그너스가 울고 있었고, 그런 주제에 그에게는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나흘 전 그 식당에서, 알렉산더는 차라리 진담에 가까운 농담을 하려 했었다. 연애는 그만두고 결혼부터 해도 좋겠네요. 매그너스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펄쩍 뛰었을지도 모른다. 라이트우드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부모는 장자가 게이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결혼’이란 말에 미묘하게 반응했지만, 알렉산더는 자신 있었다. 그들은 알렉산더를 사랑했고 알렉산더도 그의 부모를 존경하고 아꼈다. 결국에는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니 매그너스가 문제였다.

알렉산더는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댄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근래 뉴욕의 날씨는 알렉산더의 기분과는 달리 청명하기만 했다. 하늘은 참 푸르렀다. 저렇게 밝은 파스텔 톤의 하늘색보다는 짙은 암청색의 셔츠가 매그너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미치겠네.”

고개를 저어 매그너스에 대한 생각을 떨친 알렉산더는 조용히 식사 중인 길고양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점 하나 없이 새까만 고양이는 최근 라이트우드 남매가 함께 사는 아파트를 기웃거리며 거주민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게 분명한 고양이에게 가까이가지 않으려 했으나, 어느 날 샛노란 눈을 마주하고서 생각을 바꾸었다. 어쩐지 그 눈이 마음에 들었던 까닭이었다.

쓰레기를 버린다는 핑계로 아파트의 뒷문을 나선 알렉산더는 며칠간 그러했듯이, 사료 캔을 따서 까만 고양이 전용의 밥그릇에 부어 주었다. 알렉산더가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 까만 고양이는 처음에는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으나, 알렉산더가 멀찍이서 딴청을 피우자 안심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알렉산더는 길고양이에게 푸념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매그너스는 알렉산더의 연락을 무시하고 있었다. 매그너스보다는 길고양이에게서 답을 듣는 게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일 정도였다.

정말로 이대로 끝낼 작정인 걸까? 애써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이별을 떠올리자, 알렉산더는 우울해졌다. 알렉산더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원하던 상대를 찾았다고 자신했었다. 첫 만남이 다소 어수선했고, 매번 매그너스가 그를 밀어내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수줍음이 많은데다 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아 5개월을 사귀면서 키스를 해 본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그렇지만 헤어졌다.

매그너스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야만 했다.

긴 한숨을 내쉰 알렉산더는 다시 고양이가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요망한 길고양이는 밥만 먹고 어느새 바람처럼 사라져 있었다.

너도 매그너스처럼 날 떠나는구나. 한 번 더 한숨을 토해낸 그는 지저분한 문가에서 몸을 바로 세웠다. 며칠 심란해서 병가를 내고 회사를 쉬고 있었지만 일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알렉산더는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우는 매그너스도, 예쁜 노란 눈의 고양이도 잊기로 했다.

실연을 극복하는 정석 중 하나인 ‘사생활을 잊고 일에 몰두하기’는 한동안 효과가 좋았다. 회사 경영은 순탄했다. 별다른 우환도 없었고, 알렉산더의 일상은 매그너스가 없던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평탄함이 알렉산더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알렉산더를 즐겁게 하는 유일한 상대는 그를 피하는 중이었다. 그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을 골라 하며 새벽에 귀가하는 짓을 반복했다.

“대체 이번에는 뭐가 문제야?”

그러니 이사벨의 짜증은 각오했던 일이었다. 소심하기 이를 데 없고 오빠의 부탁이라면 다 받아주는 동생이라 할지라도, 혈육이자 동거인이 늦게 퇴근하기를 반복한다면 심히 신경쓰이긴 할 터였다. 알렉산더는 귀가 직후 거실을 지나가다 성이 난 이사벨과 마주치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밤에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피부 거칠어져.”

“난 오빠가 그럴 때 정말 싫더라.”

“뭐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려버릴 때.”

언변은 기막히게 좋아선. 이사벨이 작게 투덜거리며 방으로 직행하려는 알렉산더의 손목을 붙잡았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눈가에 졸림을 덕지덕지 묻혀 둔 여동생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그는 순순히 이사벨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부엌의 식탁에는 말린 과일과 맥주 한 팩이 놓여 있었다. 술이라면 질색하는 앤데……. 이사벨은 오늘 작정한 것 같았다. 알렉산더는 마지막 저항을 해보기로 했다.

“나 잠깐 눈 붙이고 출근해야 하는데.”

“그럼 짧게 얘기하면 되겠네. 용건만 간단하게.”

묻는 말에 대답이나 바로 하라는 소리였다. 다시 어깨를 으쓱인 알렉산더가 이사벨의 맞은편에 앉았다.

“좋아, 말해 봐.”

“어떤 걸?”

“요즘 죽어라 일만 하잖아. 클럽도 안 가고.”

알렉산더는 말없이 맥주 캔을 하나 집어 들었다. 매그너스는 그가 클럽에 드나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데이트 상대가 매그너스가 아니었다면, 서로 적당히 이용해먹고 헤어질 또 다른 남자였다면, 알렉산더는 코웃음치고 말았을 것이다. 내 사생활은 어느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는데 자기가 뭐라고?

그런 알렉산더를 바꾼 건 매그너스였다. 다비드 조각상만큼이나 오래 되었다고 했지만 여전히 순진해 보이는 사람. 아기고양이 사진을 보면서 함박웃음을 짓는 사람.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유치원생들의 장난 같은 키스에도 귀 끝이 새빨개지는 사람.

알렉산더는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이름 하나를 뱉어냈다.

“매그너스가 날 찼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매그너스’라는 단어를 말하고 싶었다. 알렉산더는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깊이 묻고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매그너스, 그 아름다운 남자를 언급한 것까지는 좋은데,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심적인 타격이 컸다.

“매그너스라면 전에 말한 새 남자친구?”

“전 남자친구가 되었지만.”

이사벨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알렉산더는 블랙프라이데이에 백화점을 헤매는 쇼핑중독자처럼 새로운 사랑을 찾아다녔고, 시간이 지나면 충동적으로 구매한 물건에 관심을 잃듯 상대를 갈아치웠다. 고작 한 번의 실연으로는 천하의 알렉산더 라이트우드를 이렇게 흔들 수 없었다.

“이지, 나 말이지.”

갑자기 목이 타, 알렉산더는 캔에 담긴 맥주의 절반을 단숨에 마셨다. 곧 있으면 해가 뜰 터였고, 그러면 다시 지옥 같은 출근길에 올라야했으니 알코올은 자제해야 마땅했지만 불가능했다. 매그너스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 사람에게 그걸 주려고 했었어.”

“그거라니……. 설마 그 반지?”

“그 반지.”

“세상에, 알렉.”

이사벨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알렉산더가 말한 반지가 무언지 알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반지를 구매했던 그 날에, 알렉산더는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는 처음으로 여동생에게 나약한 소리를 했고, 이사벨도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혈육이 감정을 다잡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그 때 처음 보았다. 이사벨은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단을 내린 듯, 허공을 응시한 채 굳어 있는 알렉산더를 불렀다.

“오빠에게 그 반지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 매그너스라는 사람이 왜 오빠를 찼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인연이란 건 혼자서 막무가내로 이어갈 수는 없는 거잖아. 받아들이고 털어내. 세상에 오빠 취향이 그 사람 한 명밖에 없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 한 명 뿐이면?”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 사람은 여전히 날 좋아하는데?”

“오빠를 좋아하는데 찼다고?”

졸음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한 이사벨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타로 점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지? 예전 손님이 사기죄로 고소해서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한대? 아니면 조직의 검은 돈을 써서 오빠를 들먹이며 협박하려는 위험한 상황이라거나?”

“넌 형사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너한테 정식으로 소개하려고 했던 그 남자친구가 자긴 악마의 자식이라며 나중에 서로 상처입기 전에 일찌감치 헤어지자고 했어’라고 털어놓는 순간, 이사벨은 알렉산더가 모르는 인터넷 용어를 남발하며 흥분할 게 뻔했다. 아니면 매그너스의 정신이 뉴욕, 구체적으로는 그 사람의 머릿속에 멀쩡히 박혀 있는지를 의심하거나.

알렉산더는 더 캐묻고 싶어 하는 이사벨을 손을 내저어 물리친 뒤 방으로 후퇴했다. 지독한 피로감 속에서 알코올 기운이 스물스물 올라와 그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알렉산더는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휴대폰에서 매그너스의 연락처를 찾아냈다. 부재중 통화는 넘쳐났고 답변이 없는 문자는 보기 흉하게 쌓여 있었다.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침대에 모로 누운 알렉산더는 휴대폰을 얼굴 가까이 가져다대며 중얼거렸다.

난 이번에야말로 잘 될 줄 알았어.

왜냐면 매그너스 베인, 당신이니까.

휴대폰을 움켜쥔 채, 알렉산더는 기다란 몸을 구부정하게 말고 두 눈을 감았다.

 

 

***

 

 

알렉산더는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지독히 슬펐다. 그는 몇 번이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입술을 사려 물었다.

때는 만물이 사랑을 나누는 봄이었다. 포근한 공기에 약이 올라 투덜거리던 알렉산더는 사거리의 표지판을 눈치 채고는 생각에 잠겼다. 왠지 낯이 익은데. 익숙한 표지판을 마주하니 어디로 가야할 지 확신이 섰다. 겨울을 채 벗어나지 못해 엷고 창백한 햇살이 사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햇살을 피해 그림자가 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가 우연히, 어쩌면 운명처럼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보석상 앞이었다. 권총이 있다면 아무나 쏴 죽이고 싶을 만큼 달아올라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경탄으로 바뀌었다. 도로를 향해 전시된 수많은 장신구 중에서 단출한 모양새의 반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밝은 회색빛에 가까운 반지는 백금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알렉산더는 한참동안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조. 이름의 전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기억하고 있는 그 남자의 애칭은 ‘조’였다. 그는 조를 클럽에서 만나 일 년이 넘도록 사귀었다. 성실한 사람이었다. 알렉산더에게도, 이사벨에게도, 마주치는 그 누구에게나 진실하게 대했다. 그 솔직함과 성실함이 닻이 되어 그를 정착시켰다. 알렉산더는 하고 많은 이별의 원인 중에서 바람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알렉산더는 가차 없이 굴지 않았다. 상처 입었어도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해명을 요구하자 조는 변명을 했다.

‘이건 아니라고, 나도 처음에는 다시 생각해보려고 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조가 제 3의 상대를 향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을 때 알렉산더는 미련을 버렸다. 선물한 자동차 열쇠나, 비싼 브랜드의 옷, 여하간 남자친구를 위해 기꺼이 바쳤던 모든 것들에게서 관심을 끊기로 했다.

알렉산더는 오른편에 시선을 두었다. 부드러운 유백색의 반지는 같이 진열된 것과 디자인이 달랐다. 가라앉은 녹색 빛의 보석이 중앙에 박혀 있었다. 언뜻 보기에 단정해보이면서도 화려한, 젊은 신혼부부가 좋아할 만한 청혼용 반지였다.

일 년, 어쩌면 반 년 안에 알렉산더는 저런 반지를 샀을지도 몰랐다. 그런 후에는 이사벨이나 다른 친구들을 끌어들여 우스꽝스러운 프러포즈 이벤트를 준비했을 터였다. 생에 가장 부끄럽고 멋질 나날들은 이제 맛볼 수 없는 환상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게 못 견디게 슬펐고, 반지 쪼가리를 보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떠올라 우울해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스스로를 질책하는 대신 첫 눈에 보고 호감이 갔던 반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알렉산더는 한참의 고민 끝에 가게 안으로 들어가 반지를 샀다. 보석도, 받을 상대도 없는 반지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반지는 그의 희망이었다. 언젠가, 분명 다가올 미래에, 이것과 꼭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놓치지 않고 그의 상징을 손가락에 끼워주겠다는.

그 사람이 설령 악마의 자식이라 해도.

“허락하겠네.”

난데없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알렉산더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알렉산더는 사거리에서 벗어나 매그너스의 가게 앞에 있었다. 신비함과 수상쩍음을 동시에 강조하는 타로 가게의 현관에는 네 살 아이만한 고양이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 조각상이 말을 걸고 있었다.

“이거 꿈인가?”

알렉산더가 망연히 중얼거리자 검은 고양이 조각상이 눈을 노랗게 빛냈다.

“아무렴, 꿈이지.”

“매그너스 생각을 지나치게 해서 그럴지도.”

“동시에 현실이기도 하네만. 하기야 인간에게 꿈과 현실이 무슨 상관이 있겠나? 우리를 위해 욕망에 충실하다 스러지면 그만인 것을.”

커다란 조각상이 인간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렉산더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조각상이 진짜 고양이라도 된 듯 기지개를 쭉 펴고서 킬킬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난 허락한다고 했네.”

“뭐라고?”

“그 반지 말이야. 내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줘도 괜찮다고.”

반지와 아들이 어쨌다고? 혼란스러워 하던 알렉산더의 머릿속에서 퍼즐들이 하나 둘씩 제 자리를 찾아 갔다. 커다란 고양이의 정체가 어렴풋이 짐작이 가자, 이번에는 너무 놀란 탓에 뒷걸음질조차 잊어버렸다. 그는 황금색의 눈을 응시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매그너스의 아버님 되십니까?”

“아니? 난 그저 꿈에 불과한데?”

놀리듯 반문한 고양이가 걸음을 옮겨 알렉산더 주변을 한 바퀴 느리게 돌았다. 알렉산더는 까닭을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였다. 표범처럼 거대한 고양이는 그를 언제 잡아먹는 게 좋을지 셈을 하는 포식자 같았다. 게다가 매그너스가 정말로, 그를 위해 숨김없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면 고양이, 그러니까 이 맹수는 분명…….

머릿속에 담아 두기만 했던 낯선 단어에 빨갛게 불이 들어 와 경고를 날렸다. 여기를 피하라고. 저 사납고 불결한 것에게서 멀리 떨어지라고. 그렇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도망칠 방법도 몰랐다. 알렉산더는 상자를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닳아서 거칠어졌던 함의 표면은 방금 전 가게에서 새로이 구매한 탓인지, 빡빡하면서도 좀 더 연약하게 느껴졌다.

“당신이 매그너스의 아버지라고 가정해보죠.”

알렉산더는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반지를 줘도 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글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답하면 될까.”

“매그너스는…….”

“그 애는 지나치게 겁이 많아.”

알렉산더에게서 떨어져 다시 현관 앞에 자리를 잡은 고양이―매그너스의 아버지가 턱을 쭉 위로 들어올렸다. 길고 얇은 수염으로 덮여 있던 고양이의 턱은 계속 위로, 더 위로 올라가더니 모습을 바뀌었다.

난 두 번 다시 고양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겠구나.

맹수의 껍질을 벗어던지듯 나타난 악마는 알렉산더의 두려움과는 별개로, 다소 구시대적으로 차려 입은 온화한 중년 남성처럼 보였다. 허나 어느 누구도 이 남자를 무시하지는 못할 터였다. 옅은 미소로 포장한 입가는 눈앞의 모든 것들을 깔보는 게 당연하다는 잔인함과 오만함이 머물러 있었다.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흠, 그럭저럭.”

별로라면 잡아먹고 시치미를 떼려 했는데. 뻣뻣하게 굳은 알렉산더를 위아래로 훑어 본 악마가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물러가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애는 매번 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거다. 난 그걸 매번 받아주었고. 그 양반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제 길을 따라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양들을 일일이 용서하고 인도해야 했으니. 들어라, 검은 양아…….”

악마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른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알렉산더는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베개 맡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휴대폰이 번쩍번쩍 벨소리와 불을 뿜고 있었다.

“여보세요?”

“당신 미쳤어요?!”

이게 누구 목소리지. 잠이 덜 깬 알렉산더가 휴대폰을 쥐지 않은 빈손으로 눈을 비볐다.

“지금 어디예요?”

“뭐라고요?”

“지금 어디냐고요! 집이에요? 회사? 차 안?”

흥분한 목소리의 정체를 깨닫자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돌아왔다.

“매그너스? 왜 전화했어요?”

“그건 내가 할 소리거든요!”

열흘 가까이 듣지 못했던 음성에 답답함과 속상함이 흘러넘쳤다. 헤어져 남남이 된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알렉산더는 매그너스가 걱정스러워졌다. 여태 연락을 무시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펄펄 뛰는 걸까?

“지금 어디죠? 무사한가요?”

“어, 집인데…….”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매그너스의 단호한 답변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알렉산더는 휴대폰을 쥔 채 망연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방금 매그너스가 전화해서 화를 낸 건가? 그리고 집으로 오겠다고? 이미 헤어진 마당에 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그너스는 빈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곧 아파트로 찾아올 터였다. 거울을 찾던 알렉산더의 시선이 일순 베개에 머물렀다. 휴대폰이 있었던 곳에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검붉은 반지 함. 자동차 조수석에 던져놓고 외면했던 그 상자가 난데없이 베개 밑으로 기어들어와 있었다.

알렉산더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

알렉산더는 심난했다. 매그너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보다도 더 그랬다. 찝찝한 꿈을 꾼 그의 낯빛은 엉망이었고, 옷을 갈아입지 않고 불편한 자세로 잠든 덕분에 온몸이 쑤셨다. 바삐 샤워를 끝마친 그는 머리를 채 정돈하기 전에 격하게 울어대는 휴대폰을 집었다. 매그너스가 아파트의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대충 머리를 빗고, 흰 셔츠와 청바지를 걸친 알렉산더는 급히 방을 나섰다―그러려다 침대를 노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알렉산더는 결국 반지 상자를 들고 등을 돌렸다.

출근 시간에 아파트의 출입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매그너스는 어느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바쁜 사람들을 피해 구석에 서 있었다. 그 모양새가 지나치게 어색하여, 좀 전에 전화로 호통 쳤던 동일인이 맞나 의아할 정도였다.

알렉산더는 매그너스에게로 걸어가며 전 남자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낯선 곳을 경계하는 초식동물처럼 눈알을 부지런히 굴리던 매그너스가 그를 돌아보고는 묘한 얼굴을 했다. 알렉산더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잠시 주춤한 알렉산더 대신에 매그너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출근의 사명을 진 무표정한 뉴요커들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둘을 쳐다보았다.

오래간만의 키스를 질척하게 이어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각고의 인내심이 필요했다. 알렉산더는 매그너스의 등을 달래듯이 쓰다듬어주고서 천천히 입술을 뗐다. 로비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달라붙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낀 알렉산더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데에 망할 반지를 걸 수도 있었다.

“나도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매그너스.”

매그너스는 말없이 알렉산더를 올려다보았다. 무언의 호소에 알렉산더가 입가를 말아 올렸다. 그도 매그너스가 부족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알렉산더는 매그너스의 팔목을 잡고 아파트의 뒷문으로 이끌었다.

매그너스를 집으로 데려가자니 이사벨이 마음에 걸렸고,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은 뒷문 너머 쓰레기처리장밖에 없었다. 그리 로맨틱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알렉산더는 매그너스가 왜 이렇게 두서없이 행동하는지 답을 듣고 나서 낭만을 찾아도 된다고 여겼다.

허나 막상 공터에 다다른 매그너스는 움찔 놀라 알렉산더의 손을 뿌리치고 거리를 두었다.

“그가 여기도 왔었군요.”

“대체 누구를…….”

반문하려던 알렉산더는 매그너스가 꿈속의 ‘그 남자’를 말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눈치 챘다.

“됐어요.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이해 못할 테니까.”

한 손을 내저은 알렉산더는 문득,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여전히 날 사랑하네요.”

“알렉산더, 난…….”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허둥지둥 달려온 거죠? 내가 왜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봐요. 난 다친 곳도 없고 멀쩡해요.”

“거울이나 보고 말해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을 피해 땅바닥을 바라보던 매그너스가 중얼거렸다.

“전에 만났을 때보다 창백하잖아요.”

“언제요? 당신이 날 찼던 그 때요?”

이번에는 매그너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한숨을 내쉰 알렉산더가 물었다.

“당신 아버지가 정말로 악마인가요? 고양이 눈을 가진?”

매그너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요.”

“그 악마가 나와 헤어지라고 협박했었나요?”

알렉산더의 질문을 듣는 매그너스의 감은 눈가가 떨렸다.

“그 악마는, 내 아버지는, 모두를 싫어해요. 예전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찮게 여기는 존재를 농락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고요.”

“그가 마음먹으면 날 해치는 건 일도 아니겠네요.”

알렉산더가 속삭이듯 대꾸하며 매그너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매그너스의 양손에 반지 상자를 쥐어 주었다. 손에 쥔 게 무엇인지 몰라 당황하면서도, 매그너스는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할 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위험하면 당신이 지켜주면 되잖아요. 같이 싸워도 되고요.”

“알렉산더,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없어요.”

“내 말은, 위험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당신을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알렉산더는 미소 지었다. 물론 그는 ‘낮에는 귀엽고 밤에는 섹시하지만 아버지라 주장하는 악마가 꿈에 찾아와 아들과 잘 지내라며 협박성 멘트를 남기고 사라지는 위험천만한 상대’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의 소원은 그보다는 간단했다. 그는 이 반지처럼, 한 눈에 마음에 들면서도 오래도록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고 사랑에 허우적거리게 해 줄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매일 밤 빌었다.

알렉산더에게는 매그너스가 그런 사람이었다.

세로로 길쭉한 동공의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는 남자가, 알렉산더에게는 기적과 운명을 합쳐놓은 사람이기도 했다.

“원래 이런 눈이었어요?”

알렉산더는 눈물이 고여 있는 매그너스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새싹 같은 연둣빛이 퍼져 있는 노란 고양이 눈은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하리만치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 눈, 무섭지 않나요?”

“예쁜데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잔뜩 긴장하던 매그너스가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며, 알렉산더는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을 쭉 기다려왔어요.”

“음, 그건 아닐 거예요.”

알렉산더는 분위기를 초치는 상대를 엄격하게 바라보았다.

“눈치 모자라고 할아버지 같은 패션 센스를 가진 주제에 토끼풀처럼 귀여운 특정한 누군가를 기다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정말이에요.”

그리고서 알렉산더는 상자를 열어보라 채근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내용물을 확인한 매그너스가 악마의 증표인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

청혼은 아니고요. 알렉산더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는 냄새나는 아파트 뒷골목에서 프러포즈하는 매너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한 달을 살든, 아니, 천 년을 산다고 한들 남은 시간 전부를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한다는 증표.”

“나, 난 그런 걸 받을 수 없어요.”

“아, 맞아. 아버님도 당신에게 이걸 줘도 된다고 했어요.”

“……아버님이라고요?”

“우리가 나중에 결혼한다면 내가 그 고양이를 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하잖아요.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묵묵히 알렉산더와 반지를 번갈아보던 매그너스가 고개를 작게 내젓고는 반지를 집어 들었다. 반지는 오른 중지나 검지가 아닌, 약지에 꼭 맞았다. 놀라는 데 이골이 났는지, 매그너스는 지친 얼굴로 알렉산더를 보았다.

“역시 당신에게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알렉산더는 해맑게 웃었다.

 

***

 

 

알렉산더에게는 다시 남자친구가 생겼다. 매그너스 베인이라는, 고양이 눈을 한 악마가 친부이며 친모는 오래 전 세상을 떠나 사 백년이 넘도록 홀로 살아 온 월록이었다.

‘정말로 혼자 살지는 않았겠지.’

그 동안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까? 뱀파이어, 웨어울프……. 악마가 실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영화에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초자연적인 존재들과 어울려 지냈을 수도 있었다. 알렉산더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겨우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상대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는 매그너스에게 괜한 걸 물어봤다가 또다시 종족 차이니 뭐니 하는 이유로 헤어지게 될까 두려웠다.

어쨌든 매그너스에게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매그너스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면 약지에 착용하고 다니는 반지를 쓰다듬었다. 단 둘이 있을 때면 반지를 매만지는 대신 알렉산더에게 가벼운 키스를 해주기도 했다. 매그너스는, 확실히 예전보다 신체 접촉도 늘고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어졌다.

알렉산더는 매그너스가 곁에 있어 행복했다.

알렉산더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심지어 매그너스는 요즈음 그를 타로 가게로 종종 초대하고는 했다. 언젠가 헤어질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인지,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사적인 공간으로는 좀처럼 부르지 않던 사람이었다. 알렉산더는 예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변한 남자친구의 초대를 매번 기껍게 받아들였다.

매그너스의 부탁을 받고 하와이안 피자를 포장해 간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타로 가게의 입구에 놓인 예의 고양이 조각상에 시선이 갔다. 자신을 반겨주는 남자친구와 가볍게 키스를 나눈 알렉산더는 저 예술품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를 물었다.

“별 거 아니에요.”

매그너스는 눈에 띄게 불편해하며 답변을 얼버무렸다. 포장해 온 피자를 간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알렉산더가 작게 콧소리를 냈다.

“뭐, 그렇다면야.”

“그냥 오래 된 장식품이에요.”

“매그너스가 그렇다면 그렇겠죠.”

“믿어 봐요, 좀.”

알렉산더는 천천히 매그너스를 돌아보았다. 매그너스의 시선이 일순 몽롱해졌다. 알렉산더는 퇴폐적이면서 시선을 뗄 수 없을 만치 매력적인, 이른 바 클럽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요. 믿을게요.”

“그, 그래요.”

“그런데 저 고양이는 어떤 고기를 제일 좋아해요?”

“물고기의 간을 제외하면 뭐든지.”

매그너스는 얼떨결에 대답해놓고서 소리 내어 웃는 알렉산더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당신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더 유혹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그거 신기하네요. 나도 매일 같은 생각하는데.”

남자친구의 뺨에 부드럽게 입 맞춘 알렉산더는 매그너스의 어떤 점이 그를 매번 시험에 들게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속삭여주었다. 방금 키스했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알렉산더는 허기를 느끼고 입맛을 다셨다.

다음 날 알렉산더는 타로 가게 앞의 고양이 조각상 앞에 고급 사료 캔과 닭가슴살을 쌓아놓았다.

밑져야 본전인, 그들의 해피엔딩을 위한 뇌물이었다.

Fin.

© 2018.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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