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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인님

@liayn_malec

< 용(龍)의 신부 >

용(龍)의 신부. 천년 전 처음 태어난 용의 신부는 등 전체에 푸른 비늘무늬가 가득했다. 흉조(凶兆)라 멸시당하며 이름조차 없었던 용의 신부에게 용이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였다. 그녀의 등에 새겨진 비늘과 같은 아름다운 푸른 색을 가진 청룡은 그녀를 찾아오자마자 그녀를 무시하고 힘들게 하던 주변을 모두 쓸어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도우(到佑)라 이름지은 나라에 용의 신부를 초대 여왕으로 세운 청룡은 여왕의 생이 다할 때까지 묵묵히 그녀의 옆을 지켰고 여왕이 눈을 감는 날, 그녀의 시신과 함께 사라졌다. 그 후로몸에 희한한 징표(徵標)를 가지고 태어나는 용의 신부라 불리는 아이들이 종종 태어났지만 아직까지 신부를 찾아오는 용은 없었다. ………… 몇 백년의 시간이 지난 후 용의 신부는 부패한 귀족들의 노리개로 취급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도우(到佑)국의 아픈 역사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도우국 건국신화(到佑國 建國神話) 中

 

 

***

도우국 서쪽에 위치한 희목림(熙木林)은 초대 여왕과 용이 만난 숲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우거짐이 인간세계의 것이 아닌 듯하여 방문자를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죽음의 숲으로 또한 유명했다. 하지만 그 유명세 때문에 용이 기거한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 사람들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여러모로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숲이었다.

"야 꼬맹이 너 조금만 더 들어가면 희목림이라고!"

"희목림.. 죽음의 숲..?"

"이게 누구 인생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나!! 당장 이쪽으로 오지 못해!!"

산만한 덩치의 남자가 숲의 초입에 서있는 소년을 향해 소리쳤다. 며칠을 먹지 못했는지 소년의 몸은 툭 치면 부러질 정도로 말라 뼈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소년의 눈동자만큼은 황금보다도 더 빛났다. 산만한 덩치의 남자는 그 묘안(猫眼)을 뚤어지게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노예시장에 나오는 '용의 신부'들 가운데서도 저 놈은 최상품이었다. 용의 신부라며 들어오는 아이들은 몸에 비늘무늬를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 한두명씩 특출나게 특이한 징표(徵標)를 가진 아이들이 있었다. 십 년만에 찾아낸 저 '용의 신부'는 말 그대로 부르는게 값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꼭 잡아야했다. 죽음의 숲이라 불리는 희목림에 발을 들여서라도..!

소년은 흔들리는 팔을 애써 꽉 잡으며 죽음의 숲으로 달려들어갔다. 저 덩치 큰 아저씨에게 잡히면 분명히 노예로 팔려갈게 뻔했다. 자신은 '용의 신부'이니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매화가 흐드러지던 날 태어나 '매(梅)야'라고만 불리던 소년은 내내 집 밖을 나올 수 없었다. 제 눈에 박힌 이 망할 징표 때문에. 소년이 이를 으득 갈며 중얼거렸다. 이 숲에 용이 산다니 만나서 한 번 물어나볼 요량이었다. 아니 진짜로 존재하기는 하는건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숲으로 들어가나 저 덩치에게 잡히나 죽는 건 매한가지일테니. 하지만 소년의 몸은 머리를 따르지 못하고 자꾸만 비틀거렸다. 결국 등 뒤로 바짝 따라온 덩치는 소년의 검고 퍼석한 머리카락을 거머쥐었다.

"네까짓게 뛰어봐야 벼룩이지."

"아악!!! 이거 놔!!! 놓으라고!!!!"

"뱃거죽에 들은 것도 없는 놈이 잘도 빽빽거리네."

 

이제 돈 많은 나리한테 팔려가면 혀가 잘려 지르고 싶어도 지를 수 없을테니 마음껏 소리내보라구. 덩치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소년을 질질 끌고 숲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힘없이 끌려가다가 번뜩 눈을 뜨고는 숲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용의 신부다!!!!!"

"미친 새끼가 뭐라는거야? 네가 용의 신부인거 누가 몰라?"

"용의 신부가 왔다고!!!! 만약 이 숲에 진짜 용이 있다면.."

나타나란 말이야!!!!!! 말이야... 이ㅇ...! 조용한 숲 속에서 소년의 절박한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윙윙 울려퍼졌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고요해진 숲 속을 바라보던 소년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었다. 역시 용이 있다는 건 다 거짓말이였어.. 인간은 용의 신부가 될 징표(徵標)를 가진게 아니라 용에게 저주 받은거야..

 

"하하하하! 이제 발악은 다 한거냐?"

"..."

"꼬맹이 용이 있다고 믿냐?"

"...아니."

"헛된 희망은 빨리 버리는게 현명하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아주 돈많은 늙은이에게 보내줄테니. 용의 신부 컬렉션이 있는 양반이거든."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거다. 대신 뒷구멍 걱정은 해야겠지만. 기분나쁘게 킬킬대며 소년을 내려다보던 덩치는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에 어깨를 뚫리고 말았다. 소년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자 소년은 사력을 다해 덩치에게서 빠져나왔다. 퍼석거리던 머리카락은 절반 이상이 잘려나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휘청거리며 달리다 발밑에 돌부리에 걸려 중심을 잃은 소년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잡아들었다. 사람..? 소년은 고개를 들어 저를 잡아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했다. 검은 두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사내는 무감각한 눈동자로 소년을 내려 보다 입을 열었다.

"너냐?"

"...에?"

"눈깔을 보아하니 네가 맞군."

"너 뭐하는 놈이야!!! 그 꼬맹이는 내가 먼저 찾았다고!!"

팔을 꿰뚫린 덩치는 열이 잔뜩 올랐는지 씩씩거리며 소년을 향해 다가왔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제 허리에 감긴 팔을 꽉 잡았고 두건의 사내는 눈썹을 찌푸리며 덩치를 노려보았다. 사내가 소년을 일으켜 제 뒤로 보내고 팔에 걸쳐져있던 사내의 키만한 커다란 활을 들어 덩치를 향해 겨냥하자 걸음을 멈춘 덩치가 당황한 듯 더듬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았다고.. 7대 3으로 하지."

"..."

"아, 거 형씨 욕심 참 많으시네.. 6대 4?"

"..."

덩치가 웃는 낯으로 껄렁대는 걸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의 뒤에 몸을 숨긴 소년의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렸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소년이 간절하게 비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두건 쓴 사내는 덩치를 겨누고 있던 활을 내렸다. 제 거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한 덩치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소년 쪽으로 한발자국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사내의 뒤에 꼭꼭 숨은 소년의 작은 어깨를 우악스럽게 쥐고는 앞으로 끌어내려했지만 소년은 필사적으로 사내의 옷을 꽉 쥐었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왜?"

"...?"

"징표가 아니라 저주라며. 근데 왜 살고 싶지?"

"무슨 소리야 형씨? 잔말말고 꼬맹이 이쪽으로 보내라고."

"말해봐. 왜 살고 싶은지."

"윽.. 살아서 날 이렇게 태어나게 만든 용을 죽여버릴거야..!!!"

제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용을 죽여버리겠다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서슬퍼런 안광(眼光)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두건 쓴 사내가 저도 모르게 소년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툭툭 두어 번 쓰다듬었다. 소년이 멍한 표정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자 사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끌어내렸다. 검은 줄만 알았던 사내의 눈동자가 희목림(熙木林)의 나무를 가득 품은 듯 녹(綠)빛으로 변했고 그 안에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소년의 황금빛 묘안(猫眼)처럼.

 

"ㄷ.. 당신..!"

"나를 죽이려면 우선은 네가 살아야겠지."

"ㅇ,요..용??"

"살려주마 아이야."

 

이번에는 말이지. 소년을 바라보던 사내가 시선을 돌려 덩치를 향해 다시 활을 겨누었다. 녹빛의 기(氣)가 길다란 화살을 둘러싸자 당황한 덩치가 부랴부랴 숲 밖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덩치가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편안한 표정으로 떨림조차 없이 활을 겨누고 있던 사내는 활을 내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은 소년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ㅈ..진짜 용이ㅇ..에요?"

"방금까지는 용을 죽여버릴거라느니 떠들어놓고 진짜 용을 마주하니 겁이 나나?"

"..."

"그래.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그러고보니 너는.. 용의 신부라 했던가? 아무런 감흥이 없는 눈동자가 다시 갈색으로 변하자 소년의 몸이 다시금 움찔 떨렸다. 두건을 다시 코 위에까지 올려 쓴 사내, 아니 용은 소년을 지나쳐 숲 속으로 걸어갔다. 소년은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자신을 구해준 용을 따라나섰다. 저보다 세 척(尺)은 더 커다랗게 보이는 용은 자비도 없이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바빴다. 거의 달리듯이 용을 따라잡은 소년의 주변에는 어느새 크고 작은 동물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 소년은 사는 내내 집 안에만 있었던 탓에 숲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제 옆을 따라오는 사슴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소년이 용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살아도 되요?"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그야.. 이 숲 아저씨꺼 아니에요?"

"아저..씨..?"

"그럼 용님이라고 부를까요?"

 

그게 더 마음에 들면 그렇게 할게요! 소년은 언제 겁에 질렸었냐는 듯 풀어질대로 풀어진 얼굴로 싱글대며 용을 따라가며 쉴새없이 조잘거렸다. 제가 밥도 엄청 잘하고, 청소도 또 기가 막히게 깔끔하구요.. 한참을 이어지는 재잘거림에 용이 걸음을 멈추자 용의 뒤를 따라가던 소년이 그의 등에 얼굴을 부딪혔다.

"...용님?"

"알렉산더다."

"네??"

"'용님'이 아니라 알렉산더."

가장 최근까지 불린 이름이다. 라는 말에 소년의 얼굴이 더할나위없이 밝아지며 어눌한 발음으로 계속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인간에게 불린지는 오백년쯤 되었지만.. 이라는 말을 삼킨 알렉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 저 용ㄴ.. 아니 알렉산더님이랑 여기서 살아도 되는거에요?"

"그냥 '알렉'이면 된다."

"알렉.."

"꼬맹이 네 이름은?"

제 이름을 묻는 질문에 소년의 입이 조개마냥 꾹 닫혔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한참을 생각하던 소년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도 작아 웅얼대는 소리만 겨우 들은 알렉이 고개를 푹 수그린 소년을 향해 몸을 수그렸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넝마나 다름없는 옷을 꽉 쥐고있는 마른 소년을 바라보던 알렉이 소년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고는 입을 열었다.

"천천히 이야기해도 된다."

"....ㅁ..ㅐ."

"응?"

"어머니가 절.. 매야..라고 불렀어요. 매화가 피던 날 태어났다고.. 제 눈이 이러니까..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라.. 이름도.. 없..어ㅅ.. "

제 처지를 설명하는 도중 서러움이 북받쳐올랐는지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소년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알렉은 저도모르게 소년의 작은 몸을 덥썩 안아올렸다. 아까부터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제 모습이 어색하고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년이 옆에 있는 것이 이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편안했다. 갑자기 들려진 것에 놀라 눈물을 멈추고 알렉을 바라보는 소년의 동그란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에 세로로 길게 쭉 뻗은 동공. 누가봐도 범인(凡人)의 것은 아니었으니 이 짧은 인생에서 소년이 느껴왔을 고통이 어떠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매그너스라고 하자."

"매그너..스..?"

"이 대륙의 언어가 아니라 낯설수도 있겠지만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매그너스.. 앞으로 제 이름이 될 단어를 작게 여러 번 중얼거리던 소년의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알렉이 엄지손가락으로 작고 통통한 아이의 볼에 묻어있는 물기를 닦아내자 살짝 볼이 발그레해지더니 마른 팔을 들어 알렉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일단은 뭘 좀 먹여야겠군. 알렉은 볼을 부벼대는 작은 몸을 고쳐 안고 희목림(熙木林)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당장 나와."

"..."

"내가 널 못 찾을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알렉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화를 삭히는 듯 숨을 크게 두어 번 내쉬었다.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자 순식간에 작은 벌레조차 숨을 멈춘 것처럼 사방이 고요해졌다. 알렉의 몸 주변에서 녹(綠)의 기운이 일렁이더니 곧 작은 새의 형상으로 변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이 집 안을 돌아다니더니 찬장 근처에서 오래 머물렀다. 멈춘 기운을 따라 알렉이 걸음을 옮겼지만 찬장 근처에는 인기척조차 없었다. 알렉이 눈을 떠 찬장을 하나하나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리며 작은 고양이 모양의 인형 하나를 집어들었다.

 

"참 신기하지?"

"..."

"진짜 용의 신부가 된다는 건 용과 하나가 되는거나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

"네가 한낱 물건으로 변한다고 해도 다 알 수가 있거든."

 

알렉이 고양이 인형 위로 작게 입을 맞추자 인형이 부르르 떨리더니 ‘펑’ 소리와 함께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알렉이 커다래진 몸을 잽싸게 받아들었고 알렉의 품에 안기게 된 청년은 그를 올려다보며 멋쩍게 웃음지었다.

 

"헤헤.. 들켰네..?"

"내가 도술 이상한데 쓰지 말라고 했을텐데."

"이상한데 쓴 거 아니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구! 마을에 도움이 필요하면 돕기로 했잖아. 3년 전 약속 기억나지? 아랫마을에 새로온 관리라는 놈이 백성들의 피와 살까지 쪽쪽 빨아먹는 완전 못된 놈인데..! 제가 누구의 품에 있는지 잊었는지 손짓발짓을 더해가며 제가 배운 무술과 도술들로 백성들을 도와 못된 관리를 어떻게 몰아냈는지에 대해 신이 나서 설명하는 청년의 표정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소년이 숲에 들어와 청년이 되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소년은 알렉의 밑에서 무술을 배웠고 용과 각인(刻印)의 연을 맺은 후에는 용의 힘을 받아 도술도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희목림(熙木林) 안에 있는 모든 생물은 녹(綠)의 용인 알렉산더의 정기를 그대로 받아 다른 숲보다 유독 생명력이 강했다. 그러니 이 아이의 성장도 그 영향일 터였다. 10년 전, 목숨을 위협받던 연약한 소년은 이곳에 없었다. 제 근육이 잘 보여야한다며 몸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얇은 검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더니 그 위에 금박의 장식까지 달고 알렉의 앞에서 춤을 추질 않나, 어디서 난건지 손톱 위에 까만 물을 들여오질 않나.. 여러모로 알렉의 용생에 다시없을 인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알려준 비기(秘記) 매화검법으로 그 뚱땡이를..!!"

"..."

"알렉? 듣고 있어?"

"응."

 

그렇지만 네 모험담을 듣는 것보다 네 얼굴을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아 적당히 흘려듣고 있다. 그 관리인지 뚱땡인지를 처리하겠다고 이 숲을 나간 게 언제인줄 기억은 하나? 기다렸다는 듯 와다다 쏟아내는 알렉의 불평에 매그너스의 까만 동공이 당황스러움에 흔들리는 것이 꽤 귀여워 알렉은 조금 더 짖궂어지기로 했다.

 

"무려 한 해 전의 일이었지."

"...아니이.. 나도 일찍 오려고 했는데.."

"각인의 연을 맺은 자가 용과 떨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했지?"

"음.. 용의 기운이 온 몸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표적이 되기 쉽다..?"

"뻔히 잘 알면서 아주 용감한 짓을 했구나."

"그치만 그래서 알렉이 나한테 무술도 도술도 가르쳐 준거잖아!"

"그랬지. 이제와 생각하니 괜한 짓을 했다 싶더군."

 

무술따위 가르치지 말고 이 숲에서 못 벗어나게 했어야하는데.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알렉의 눈동자가 갈색빛에서 서서히 녹빛으로 변했다. 제 앞에서만 용의 기운과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알기에 알렉의 녹빛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매그너스의 몸은 전율이 일곤 했다. 매그너스 역시 도술로 꽁꽁 감춰두었던 황금빛의 묘안(猫眼)을 선연히 드러내며 알렉과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당신은 이런 나를 사랑하잖아?"

"...제길. 맞아."

알렉은 매그너스를 안고있던 팔을 들어올려 그대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 알렉의 목을 끌어안아오는 따뜻한 체온. 그의 가슴이 알렉의 가슴에 맞닿았고 매그너스의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알렉의 마음을 어지럽게 흩트려놓았다. 매그너스를 안아들고 뒷걸음질치던 알렉은 침대 끝부분에 발이 걸려 뒤로 풀썩 드러누웠고 자연스레 매그너스가 그의 위에 올라탔다. 알렉은 입느니만 못한 매그너스의 얇은 비단천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등골을 쓸어올렸고 그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입술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이나 붙어있던 입술을 떼어내며 매그너스가 알렉의 양 볼을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뭔데?"

"이번에는 같이 나가는거야. 당신이랑 나랑."

"뭐..?"

"이번에 마을에 갔을 때 들었는데 매년 도성에서 '천하제일무술대회' 라는게 열린대."

"누가 지었는지 참 촌스러운 이름이군."

"도우(到佑)국을 세운 여왕이 시작한 무술대회라던데?"

나 꼭 그 대회 가고 싶어! 그러니까 당신도 같이 가자! 알렉은 제 위에서 등 뒤로 햇빛을 받고 있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황금빛 눈동자만은 흔들림 없이 반짝거리고 있는 매그너스를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불의를 참지 못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늘 앞장서며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용의 신부. 이런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 무엇이든 나의 신부가 원하는 대로."

 

 

 

***

 

푸르렀던 희목림(熙木林)에도 어느새 붉게 노을이 내려앉았다. 제 품 안에서 곤히 잠이 든 매그너스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알렉은 제 기운을 숲 이곳저곳에 풀어내기 시작했다. 희목림이 세워진 이 땅은 오백년 전에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폐한 땅이었다. 알렉산더가 이 땅에 새로이 자리를 잡은 후부터 알렉이 가진 녹(綠)의 기운으로만 유지되고 있는 숲이었다. 그렇기에 매그너스가 숲을 떠나 자리를 비웠을 때조차 일주일 이상 숲을 떠나지 않았었다. 이미 오백년이나 지났으니 완벽히 숲을 지탱할만한 땅으로 바뀌었을테지만 알렉산더에게는 특별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떠나기 전 공들여 숲 구석구석에 제 기운을 심어두었다.

그러다 문득 매그너스의 입에서 나온 초대 여왕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청룡의 신부이자 도우(到佑)국을 건국한 여인. 건국신화에는 청룡이 그녀의 시체와 함께 사라졌다고 기록되어있지만 진실은 조금 달랐다. 각인의 연을 맺은 용의 신부의 수명은 보통의 인간보다 몇 배는 길었다. 죽음을 가장한 청룡과 용의 신부는 저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완전히 새로운 대륙으로 건너간 후 오랜 시간동안 평범한 범인(凡人)처럼 살아갔다.

 

‘아가야. 너에게도 각인(刻印)의 연을 맺을 운명의 사람이 나타날 거란다.’

‘얼마나 지나면요?’

‘금방일수도, 또는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지.’

‘아버지는 얼마나 걸렸는데요?’

‘시간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단다. 아가.’

 

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난 그 순간부터 비로소 시간에 의미가 생기지. 동그란 녹빛의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제 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행복해보였다. 어린 마음에 의미가 생기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던 때도 있었다. 지칠대로 지쳐 가족을 떠나 용의 신부가 건국했다 전해지는 도우(到佑)국으로 돌아와 죽음을 각오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숲을 만들고 오백년을 홀로 지냈다. 그리고 드디어 녹(綠)의 용은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온 자신의 운명(運命)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Fin.

© 2018.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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