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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alia님

@Rosalia_loves_C

< Tell him the truth. And all will be solved. >

1.

그에게 손에서 어른거리는 불꽃은 아직도 신기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이지만 달아오른 열기도, 쏘듯이 매서운 아픔도 없는. ‘약효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네. 벌써 한달이나 지났잖아?’

‘어쩌면 영영 없어지지 않을지도 몰라. 책에는 그런 말이 적혀 있지 않았어. 아니면 무슨 지장이라도 생기는 걸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다소 찜찜했다. 되찾은 마법에 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매그너스는 여전히 에돔과는 거리가 먼, 아주 먼, 평화로운 현재가 좋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일도 없었는걸. 그런걸 보면 지금 발현된 마법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어쩌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매그너스는 최대한 마법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능력이었다. 이루어 말할 수 없이 편리하나, 의존해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미련을 갖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사용하지 않기란 그 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매그너스는 설거지 중 손에서 미끄러진 접시를 잡기 위해 마법을 썼다.

‘오, 이런.’

 

가볍게 떠올라 제 손에 안착한 접시를 보면서 갖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떨어트리는 것보단 나았겠지. 떨어진 조각 줍기가 귀찮아 내가 마법을 썼을지 누가 알겠어. 애초에 이렇게 후회하는게 나아. 이젠 더 이상 쓰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일이 될거야. 그리고 이제는 사용하지 않을 거니까….’

날은 덥고, 잔디 깎기 기계는 고장이 났었다. 잔디는 내일 깎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매그너스는 난잡한 마당을 그대로 둔다는 생각 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잔디깎기는 옆집 필슨 부인께 빌리면 돼.’

 

걸음을 가볍게 옮기며 매그너스는 가슴을 쓸어넘긴다.

 

‘오, 그래도 필슨 부인이 생각나서 망정이지, 그도 아니라면 분명 또 마법을 쓰고 말았을거야. 생활이 이렇게나 엉망이라니.’

 

하지만 필슨 부인은 자택에 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울리는 종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닫긴 문에 매그너스는 한참 고민 끝에 손가락 끝을 문지른다.

 

‘이번 한 번만, 한 번만이야.’

그 다음은 고장난 토스트기, 세제를 지나치게 많이 넣어 거품을 토해내는 세탁기, 에돔을 연상시키는 지옥철, 비오는 날 전혀 잡히지 않는 택시…. 상황은 끝날 줄을 몰랐다. 심지어 선크림! 선크림을 지우는 것마저 귀찮은 날이 있었다. 매그너스는 고민 끝에 결국 손가락을 튕기고는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오, 제발.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안돼.’

 

매그너스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감싸안는다.

 

‘만일 마법을 사용하는게 영향을 준다면 난 이미 두 차원 사이에 커다란 구멍을 뜷었을거야.’

 

매그너스는 그 구멍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 구멍은 너무나도 커서 집 두어채는 홀라당 삼킬 수 있을 정도겠지.’

 

가슴을 찌르는 죄책감에 메그너스는 거듭 다짐을 한다.

‘래그너의 뿔에 맹새코, 나는 더 이상 마법을 쓰지 않을거야.’

그러나 늦은 아침에 일어나 일일히 요리를 하기엔 너무나도 늦었다는 것을 안 순간, 매그너스에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가 한달 동안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짚고 손가락을 튕겼고, 그의 앞에는 따끈따끈하게 익은 토스트가 자리했다. 마법의 대가로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었으나, 매그너스는 체념하기로 한다. 마법은 지나치게 편리하다. 자신이 마법 없이 여태까지 어떻게 살았는가 싶을 정도로. 오, 위대한 마법이여.

2.

마법조차 그에게 빠져나갈 여지를 주지 않았다.

매그너스는 답답한 심정을 숨긴체 최대한 예의바른 미소를 꾸며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 우리 만난 적 있죠? >

그는 이런 상황이 견딜 수 없다. 부리부리하게 뜬 눈을 앞에 두고서 매그너스는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 제 생각엔 그런 것 같군요. >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 당신이 그때 어딜 갔나 싶었어요. >

‘그때 모든 일이 끝나고 일이 커지기 전에 집에 돌아와서 다행이지.’

< 글쎄, 그 때는 모두들 바빴으니까요. >

< 맞아요. >

남자는 낮게 웃는다.

< 아무리 클레리-클레리 아시죠? 둘이 친해보이던데. (매그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와 제이스가 못 말린다고 한들 지하실에서 그렇게 취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파티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나타나질 않으니 사람들이 다들 기겁했죠. >

< 그러게요. >

매그너스는 짧게 대답한다. 그 상황을 꾸며낸 것은 바로 그였다.

<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요? >

‘하지만 둘이 평행세계의 자신들이 몸에 일시적으로 빙의해 악마를 처치하고 있었다고 말하게 두는 것보단 낫잖아?’

<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

< 오. >

남자는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 클레리가 여기 점술이, 그러니까 타로가 꽤 신빙성 있다고 해서요. 처음에는 크게 관심 없었지만, 그래도 막상 오니 뭔가 다르네요. 아 참, 제 이름은 알렉산더에요. 알렉이라 부르셔도 좋고요. >

매그너스는 남자가 타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3.

< 싫습니다. > 매그너스는 호의를 단호하게 끊어 낸다. < 고객과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자 하거든요. >

매그너스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느낀다. 그가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말씀드린 그대로, 저는 당신과의 보다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다고요. 당신이 어떤 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일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 어떤 도움도 제게선 받을 수 없을겁니다. >

 

매그너스는 친절히 답변한다.

 

< 그렇다면, 좋은 하루 되십시오. >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매그너스는 문을 닫는다. 그 어떤 대답도 듣지 않고서.

반면, 밖으로 밀려나간 알렉은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인다. 오만가지 감정 가운데 속상함이 선두를 차지한다. 그를 그렇게 속상하게 하는 것은 거절이었나? 알렉은 생각해 보았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알렉은 한참을 닫힌 문 앞에서 서성거린다. 어쩌면,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글쎄, 그는 문이 꼭 열릴 것처럼 여기고 있다. 닫힌 문만큼이나 더욱 열기 쉬운 문이 있을까? 참으로 단촐한 문이다. 알렉은 생각한다. 문은 주인보다도 오래되어 보인다. 알렉은 문이 그 주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은 지나치게 초라했다. 명패를 아로새긴 금박 테두리는 꽤 세련되어 보이나, 주인의 취향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그것은 분명 주인이 선택한 것은 아닌 듯싶다. 너는 주인을 잘못 만났구나. 알렉은 속으로 속삭인다. 아니면 주인이 문을 잘못 만난 것이었던가? 좋은 하루 되십시오, 라니. 다분히 의례적인 말임에도 불구하고, 알렉은 계속해서 그 말을 곱씹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알렉은 ‘Day’(하루)라고 발음하던 주인을 좀처럼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었고, 그것은 한참이나 메아리처럼 그의 골을 울려댄다. Day, day, day. 혹 그가 정말로 내게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알렉은 그것이 사실이기엔 지나칠 정도로 좋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조그마한 희망보다도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을까? 알렉은 좀처럼 그 희망찬, 그러나 조그만 하진 않을 생각을 내려놓을 줄 몰랐다.

< 미쳤어. >

 

매그너스는 생각한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잡고 있던 커튼 끄트머리를 서둘러 놓는다. 남자는 아직도 자신의 집 밖에 서 있다.

 

< 그는 거절이라는 것을 모르는걸까? >

 

아니면 싫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매그너스는 방 안을 서성거리던 야단스런 걸음을 멈춘다. 그에게 자신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의도라도 있는 걸까? 매그너스는 몸을 홱! 돌려 다시금 커튼 앞에 자리를 잡고서 샛노란 눈으로 의심쩍게 남자를 관찰한다. 남자는 머저리처럼 문 근처의 작은 화단에서 흰 데이지를 쪼그려 앉아 바라보고 있다. 대문짝만한 몸으로.

 

<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꽃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겠군. >

 

매그너스는 비아냥거리며 들춘 커튼을 내던진다. 펄럭, 커튼은 다분히 불만이 많다는 투로 흔들리며 제자리에 돌아선다.

매그너스는 끝내주는 시간을 보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 자랑스럽게, 매그너스는 제 눈높이에 손가락을 쭉 뻗는다. 매그너스는 오랜만에 말끔히 정돈된 손톱을 보고 흡족함에 흠뻑 젖어든다. 오팔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진 손톱은 그를 더욱 기쁘게 한다. 매그너스는 잠시 네일-지독히도 그의 마음에 드는-이 지나치게 튀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으나,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의 손톱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 너무 걱정을 많이 해서 탈이라니까. >

 

너무 많이. 글쎄, 그는 800살이다. 그리고 800년이란 걱정할 만한 것들을 수도 없이 겪어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않던가. 당연히 걱정이 많을 수 밖에 없지. 그는 그리 생각하며 길다란 팔다리를 넉넉히 감싸안는 소파에 걸터 앉는다. 매그너스가 남자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것은 영화가 중반 즈음 지나가고 있을 때이다. 커튼은 여전히 창문을 가리고 있었는데, 매그너스는 자신이 굳이 그 커튼을 들춰 보아야하는 수고를 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남자는 제 갈길을 간지 오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손짓 한번이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매그너스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 있진 않겠지.’

 

하지만 만일 그가 거기, 그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답답해져 목이 콱 틀어막히는 것 같다. 매그너스가 800년 가량의 인생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건사고들’을 수두룩하게, 지겨울 정도로 겪어 왔었고,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일과 마주하는 것을 싫어한다.

 

‘만일 그가 문앞에 여전히 남아 있다면?’

 

생각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온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지?

 

4.

매그너스는 언제나처럼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눈을 뜬다. 오늘은 8시다. 불규칙한 수면습관을 가진 그로서는 그것이 이른 시간인지 좀처럼 알 수 없다. 그의 일정한 수입은 그가 새롭게 개척해낸 사업이 아닌 그의 안정적인 통장 계자로부터 나온다. 오, 그는 순전히 취미로만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도 좋은 일이지, 내가 사들이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그의 수집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클레리의 방문을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실제로 도움이 됬지 않은가?  매그너스는 잠시의 기이한 충동 끝에 손을 휘저어 커튼을 걷는다. 햇빛이 방안을 물들였다. 아무도. 그의 창 밖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었담.’매그너스는 침대에 다시 편하게 기대어 앉는다.

 

‘당연히 있을리가 없지.’

 

그것이 그렇게도 안일한 생각임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5.

< 언제까지 쫓아올 생각이에요? >

매그너스는 결국 뒤로 돌아선다.

< 언젠가는 뒤돌아 볼 줄 알았죠. >

남자는 응답한다.

< 뭘 바라는 거에요? 알렉산더 씨? >

< 당신을 조금 더 알아가고 싶어요. 우리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

< 이미 싫다고 답했잖아요. >

<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순 없나요? >

남자는 구슬리듯 말을 잇는다.

< 우린 마치 퍼즐 조각처럼 꼭 맞아 떨어질거에요. >

매그너스는 콧방귀를 뀐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겠지, 퍼즐 조각처럼.’

< 당신에겐 그 말이 꽤나 설득적으로 들리나 보군요. >

< 그렇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요? >

< 수천 가지 정도 떠올릴 수 있네요. >

< 당신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다에요. 그것조차 안된다는 말인가요? >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하지만, 저 음험스러운 눈을 좀 봐.’

< 그게 좋은 생각일진 잘 모르겠네요. 당신은 대화로 만족할만한 타입처럼 보이지 않아서. >

‘상대방의 성 정체성도 아직 모르는 체로 접근하는 모습을 봐. 분명 그런 타입은 아니지. 꼭 배고픈 쿠거같아. 그리고 난 점심이 될 생각은 없는 걸.’

< 시도해서 나쁠 것은 없잖아요? >

‘오, 이 세상에 나쁠 건 많지. 800년을 살아오면 그런 경우는 충분히 많이 겪는다고. 그런 건 셀 수도 없이 많아….’

< 응답해줄 때까진 계속해서 물어볼거죠? >

< 좋아요. 5분만이에요. >

< 고마워요, 매그너스! >

 

남자는 능글맞게 덧붙인다.

 

< 후회하지 않을거에요. 어쩌면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모르죠. >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매그너스는 그 사실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 단 5분만이에요. 그 후에는 일말의 고려도 없이 갈거니까요. 그리고 커피는 당신이 사요. >

< 커피보다는 식사가 좋지 않겠어요? >

< 아뇨, 커피로 해요. >

‘남자가 헛소리를 시작한다면 식사는 모르겠지만 커피는 적어도 한 번에 들이킬 수 있잖아. 그러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떠날 수 있겠지.’

< 그러면 커피부터 시작인거네요. >

< 아니면 끝일지도 모르죠. >

 

6.

‘대화’란 것이 끝나고 난 후에, 일단은 그의 고객이므로(아직은, 매그너스는 그렇게 덧붙이고 싶었다.) 예의바른 미소로 알렉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후에, 그리고 그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무슨 바보 같은 남자람. 꽃이 좋냐니 향수가 좋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또 그게 무슨 말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매그너스는 씩씩거리며 현관문을 들어선다. 남자는 자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이자 꽤 실망한 눈치였다. 자연히 매그너스는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례하기는.’

 

7.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뿐임을 깨달아야 했다. 매그너스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 … 새로운 시도네요. >

오, 맙소사. 매그너스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싶었다. 지금 그가 시스루를 입고 있는거야? 말 없는 비명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웃음 뒤로 소리친다. 그리고 옷에 광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저 반짝이들은 뭐야!

< 네. >

 

알렉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한다.

< 변화를 줘보고 싶었거든요. >

변화? 무슨 변화? 매그너스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허공을 휘젖다 알렉과 눈이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인다.

< 삶에 변화를 주는 것은 좋죠. >

매그너스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었다.

 

8.

하루는 그를 줄기차게 쫓아왔다. 매일이 놀라움과 치근덕거림의 연속이었다. 매그너스는 결국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 왜 이렇게 자꾸 치근덕거리는 거에요? >

< 또 당신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해서요. 5분의 기록을 깨고 싶기도 하고. >

< 당신에겐 이 모든 게 게임일 뿐인가요? >

< 그럴리가요. 그저 당신에게 관심이 있을 뿐인걸요. >

< 알렉, 미안하지만 나는…. >

< 오, 옷장에서 나오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매그너스. >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걸요. 알렉은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하지만 비밀로 두고자 한다면, 안심해도 좋아요.

 

‘옷장에서 나오기에는 늦지 않았다고? 맙소사.’

 

9.

< 내 삶을 살아있는 에돔으로 만들어 놓았어. >

매그너스는 투덜거린다. 래그너는 눈을 굴렸다.

< 네 말을 들으면 꼭 좋은 시절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뒤늦게 찾아온 청춘이라, 대단해, 매그너스. >

< 제정신이야? 진짜 죽을 것 같다니까! >

< 아! 뿔은 잡아당기지마! 뿔은 말고! >

< 꼭 또라이와 거머리를 합쳐놓은 것 같아. 그것도 에돔에서 올라온. >

 

매그너스는 래그너의 뿔을 잡아당기다 말고 절망조로 탄식을 내뱉는다. 손에서 뿔을 빼내며 래그너는

< 에돔은 사실상 우리의 고향인 건 알고 말하는 거지? >

< 호적상의 고향이야! 호적상의 고향이라고! >

매그너스는 고함을 지르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다.

<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자랐다고! >

< 그러던지. >

<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어. >

< 너를 더 알고 싶다고 말했잖아. >

< 나에 대해 알만한게 어디있어? >

< 800년간의 세월? >

< 난 서른이야. 800년간의 세월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오, 내가 서른일 때 무얼 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야? >

< 770년 정도. >

< 그러니까. 그 때쯤이면 나는 토가를 두르고 흙바닥에 기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고. 그걸 취미활동으로 소개하면 퍽이나, 믿겠다. 정신병원에 안 보내지면 다행이고. >

< 걔, 조금 특이하던데. 걔를 보면 옛날 생각이 나…. > 래그너는 흐릿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되짚어 본다. 화살, 활. 전투, 그런 거 있잖아.

< 알렉산더를 닮았나? >

< 아마도. 그래서 그런가? >

< 라파엘 한테 물어봐. 젊은 애들 문제는 걔가 더 잘 알겠지. 젊으니까. >

< 라파엘? 라파엘은 날 죽일거야. >

 

매그너스는 음울하게 말한다.

< 아니면 걔를 죽이거나. >

< 요점은 말이지, 걔를 죽이는 것도 원하지 않아. 오, 왜 모든 대화가 죽음으로 귀결되는 거지? >

< 그건 말이야, 일부가 악마인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천성인가 보지. >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의자를 날려버리는 모습을 보고선 래그너는 고개를 내젓는다.

< 난 가끔씩 네가 어떻게 그 성질을 죽이고 다닐 수 있는지 모르겠어. >

< 비지너스잖아. >

매그너스는 허리를 바르게 세우며 옷차림을 정돈한다.

< 공과 사는 뚜렷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지. >

10.

< 그냥 얘기를 해보는 건 어때? 단순한 얘기잖아. 그리고 막상 얘기해보면 네가 얼마나 재미없고 괴팍한지 알고서 떠나갈지도 모르지. 너를 얌전히 내버려두고 말이야. >

< 그-와-얘-기-하-고-싶-지-않-아! >

< 왜 그렇게 이야기하기 싫어하는거야? 어차피 네 고객인데, 그러다 보면 두어번은 이미 말을 섞었을 것 아니야? 그리고 넌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잖아. >

< 이상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

< 너 지금 꼬마애처럼 구는거야? >

< 그러니까, 이런 기분이 드는데 그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나쁜 것이라면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야. >

< 넌 너무 섬세해. >

< 800년이면 섬세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야. 래그너, 난. 난 많은 일들을 보고 겪어왔어.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봤고, 어떻게 끝을 맺는지도 봤지. 요점은 그거야, 나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더 이상은. 800년이야, 800년. 이제는 지긋지긋해. 석회화고, 무엇이고 다 필요없어. >

< 봐, 넌 지금 문제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잖아. >

래그너는 한숨을 쉬곤 매그너스를 소파에 내리눌러 앉힌다.

< 내가 말하는 건 그 인간하고 결혼을 하라거나, 세기의 사랑을 하라고 이야기 하는게 아니야. 뭐, 네가 그런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줄은 지금 처음 알았지만- 이건 속내를 이야기하지 않는 네 탓인거 알지?- 내가 말하는 건 한 번 시도해보란 거지. 가벼운 연애라 생각해. 넌 항상 관계에 헌신적으로 구는 게 해답이라 생각하지만, 가끔은 조금 가벼운 접근이 필요한 것일지도 몰라.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조금 얼추 맞는 것 같으면 만나도 보고. 그러다 아니면, >

래그너는 매그너스의 어께를 두드린다.

< 헤어지는 거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결단을 내리기도 쉬울거고. 그냥 문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 모든 문제들은 일시적이야. 그리고 정 그 사람이 네게 상처를 주면, 내가 자진해서 카밀에게 연락해줄게. >

맙소사, 카밀이라니. 매그너스는 얼굴을 구긴다.

< 내 친구가 맞아? >

< 가끔씩은 너를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밉지만, 일단은 그런 것 같네. >

< 이런게 몇 백년간의 우정이라니. 믿을 수 없군. >

 

11.

< 매그너스, 어쩐 일이에요? >

매그너스는 음식을 앞에 두고서 천천히 말을 잇는다.

< 식사나 같이 할까 싶어서. >

< 그건 알죠. 식사를 같이 하자고 연락했으니까…. 말을 그런데 편하게 놓으셨네요? >

< 아무래도 이쪽이 더 편한 것 같아서. 나이도 많고 말이야. >

<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네요. >

< 내 친구말이야, 네가 알렉산더를 닮았데. >

< 알렉산더 대왕이요? >

< 어. >

< 그것 참…. >

알렉은 한참을 말을 고르다 결국 입을 다문다.

< 걱정할 것 없어, 걔는 원래부터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고, 알렉산더는 잘생겼으니까. 그러니까 칭찬인거지. >

< 고마워요? >

< 그래도 난 알렉산더가 더 잘생긴 것 같아. >

매그너스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아보카도 요리를 뒤적인다.

 ‘알렉산더는 잘생겼다고? 지금 나를 말하는 건가, ‘그’알렉산더 대왕을 말하는 건가? ‘

알렉은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무렴 어떻냐는 생각에 마저 남은 음식을 덜었다.

< 매그너스, 그 요리 먹을거에요? >

< 맙소사, 알렉. 그만 좀 먹어. >

이건 데이트라고. 덧붙이는 매그너스의 말에 알렉의 눈이 커졌다.

< 잠깐,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죠? >

< 시도해보는 것도 그렇게 나쁜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

매그너스는 고개를 들자 마주친 눈에 어쩔줄 몰라 한다.

 

< 이게 좋은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

< 그리고 너 또한 괜찮다면. >

 

12.

갑작스러운 방문객을 인터폰으로 확인하고는 매그너스는 기절할 듯이 놀란다.

< 제정신이에요? >

 

매그너스는 눈을 홉뜨고서 손을 갈퀴처럼 뻗어 남자를 쾅,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남자는 태연히 웃어보인다.

 

< 당연히 제정신이고 말고. >

 

그는 명백히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인다.

 

< 지금만큼이나 제정신인 적도 없는 것 같구나. >

 

문안에 서고서야, 매그너스는 남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빛 아래선 가물가물한 밖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인다. 남자는 여전히 변함 없다. 그 오랜 세월에도.

 

< 이렇게나 나를 환대해주니 기쁘구나, 아들아. >

 

남자는 태연스럽게 현관을 지나 자신의 거처로 깊숙히 들어온다.

< 당신을 환영한다고는 하진 않았는데요. >

< 안다. >

 

아스모데우스는 태연스럽게 묻는다.

< 그래서 환대한다고 하지 않았니? >

매그너스는 진저리치듯 머리를 흔든다.

< 환영이든, 환대든 당신을 여기서 반길 사람은 없어요. >

< 아버지라 불러주지 않는다니, 서운하구나. 네 사랑스러운 입술로 그렇게 하길 간절히 바랐건만. >

아스모데우스는 느긋하게 허리를 세운다.

< 정녕 내가 한 번도 네 생각을 스쳐 지나간 적이 없느냐, 아들아. >

< 꿈에서라도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

< 거짓말은 에돔의 축복이지. > 

< 네가 그렇게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

< 네가 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네가 쏟아내는 거짓의 무더기에 휩싸여 진실이라 믿었을 거란다. 너는 언제나 끊임없는 놀라움으로 나를 흡족케 하는구나. >

<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어요. > 매그너스는 응수한다.

< 오, 너는 정말이지 재능있다 말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네가 정 네 비밀을 지키고자 한다면야. > 아스모데우스는 어깨를 으쓱인다. <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하겠구나. >

< 언제나처럼 독선적이로군요. >

<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

< 핏줄은 핏줄에게 이끌리는 법이지. 그들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단다. 이토록 험난한 세상에서, 서로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서로뿐이지 않느냐. >

< 당신이 자식들 두엇을 죽였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

< 두엇뿐이겠니. > 아스모데우스는 흥얼거린다.

< 오, 그런건 다 잊고, >

< 그건 내가 더없이 바라는 일이구나. >

< 당신이 여기,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

< 또다른 전쟁이! >

 

매그너스는 강박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긴다. 방안을 자박자박 쉼 없이 맴도는 걸음이 부산스럽다.

<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요! >

< 아들아, 전쟁은 때론 좋은 일이란다. 그보다 더한 즐거움은 좀처럼 찾을 수 없지. 진정한 에돔인이라면 알텐데 말이다. >

 

‘글쎄, 내가 진정한 에돔인이 아닌가보죠.’

< 전쟁은 나빠요. >

매그너스는 불쾌한 어조로 내뱉는다.

 

< 심지어 당신보다도 나쁘다고요. >

< 네 생각과는 다르게, 불행히도, 이번만큼은 전쟁은 나의 목적이 아니란다. >

< 아니라고요? >

< 그래. >

< 당신은 말 그대로 전쟁을 위해 죽이잖아요. >

< 그렇지. >

< 그런데도 아니라고요? >

< 그래. 그게 네게 그리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인줄 몰랐건만. >

< 전쟁광이시잖아요. >

< 정식 명칭은 에돔의 왕자란다. >

< 이 대화는 정말로 나를 지치게 만드네요. 전쟁광이시든, 에돔의 왕자이시든. 이제는 그냥 제발 이곳에 왜 왔는지 말씀해 주실래요? >

< 말한다면 머물게 해줄련? >

< 아니요. >

< 그렇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작하자무나. >

 

아스모데우스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그너스는 뒤를 돌아보곤 비아냥거린다.

< 나는 당신이 내 거처에 머물러도 된다고 이야기하진 않았는데요? >

< 나는 그렇다면 밖으로 나서 세상의 이목을 즐길 수 밖에 없겠구나. 간만의 나들이니 이슈리엘도 기뻐하겠지. >

< 좋아요. >

매그너스는 이를 악문다.

 

< 내 거처에 머물러도 돼요. >

‘에돔으로 돌아가버리면 더욱 좋고.’매그너스는 손님방을 내주며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영영.’

 

13.

< 나는 어제부터 피곤한 하루를 보냈고, 네게서도 그런 피곤을 받고 싶지 않아. >

매그너스는 가벼운 입맞춤 이후에 그렇게 말하며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알렉은 그에 대해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 무슨 일인데요? >

< 개인적인 사유. >

< 그러니까 나에게 말해줄만 하죠. >

< 아니, 말 안 할 거야. >

< 부탁해도요? >

‘ 왜 이렇게 모두들 귀찮게 하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된걸까.’

<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

 

매그너스는 말하며 진득한 엉김으로부터 떨어진다.

 

‘그리고 말한다고 한들 어떻게 믿겠어?’

 

여기서는 영영 잊힌 에돔의 왕자가 바로 내 아버지에, 그가 지금 지상에. 그것도 내 거처에 당당히 점유하고서 떠나지 않고 있다고? 그것은 자신에게 조차 믿기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 애처럼 굴지마. >

날아들어온 파이어매세지에 매그너스는 기겁하며 허공에서 재빨리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낚아챈다. 은은한 열기가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며 매그너스는 애써 침착을 갈무리한다.

 

‘누가 이렇게 공적인 장소에서 파이어 매세지를 보내?’

 

메시지는 서둘러 자신을 읽어달라는 듯 거품 같은 불꽃을 뿜어낸다. 매그너스는 무시 끝에 불길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흐르자 비명 같은 소리를 속으로 내지르고서 서둘러 손을 내저어 불길을 잠재운다.

 

‘누가 보냈던 간에, 성질이 더럽게 급하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길이 영영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매그너스는 알렉이 보지 못하도록 손에 단단히 감아쥐고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 잠시만. >

 

매그너스는 성큼성큼 자리를 옮겨 몇번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확인한 후에 손을 열었다. 불꽃 덩어리가 공중으로 솟구친다. 눈 높이에서 상승을 멈춘 불덩어리는 글씨로 화한다. 매그너스는 글씨를 금세 알아볼 수 있다. 그가 그 글씨, 그 친숙한, 모양새만으로도 향수와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고풍스러운 글씨로 허공에 글이 수놓였다.

 

‘왕자라고 드라마적 효과를 좋아하기는.’

 

Tell him the truth. And all would be solved.

Fin.

© 2018.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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