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생달님
@crescent_MM
< Come back to me >
끝이 언제일지도 모를 기나긴 삶을 사는 월록인 자신에게 신이 조금이라도 아량을 베풀어 삶에 작은 축복을 내려줬다면 그건 분명 알렉산더일 것이라고 매그너스는 확신했다. 처음 알렉을 마주쳤을 때 가슴 깊숙이 일던 작은 파동을 매그너스는 무시할 수 없었다. 악마의 자식과 천사의 후예. 월록과 섀도우 헌터. 인스티튜트의 수장이자 ‘그’ 라이트우드 가문의 장남. 두 세계가 반목해온 세월만큼이나 깊은 골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운명이야.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사랑이 넘치는 브루클린의 하이월록이라고 할지라도 이건 지나치게 로맨틱한걸. 매그너스는 제 옆에서 곤히 잠든 연인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창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에 피부가 창백하게 빛났다.
네가 내 운명이야. 사해가 작은 호수일 때부터 살아온 세월이 무색해지고 못 하는 게 없는 하이월록을 쩔쩔매게 만드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네가 거대한 운명 같다. 심각하게 서정적인 생각에 매그너스가 작게 웃었다. 온기를 찾아 더듬는 연인을 손길을 따라 몸을 누였다. 알렉산더 기디온 라이트우드. 네가 나의 운명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한테도 내가 운명일까. 우리가 서로의 운명일까.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을 던지고 매그너스가 눈을 감았다.
*
평소와 똑같은 날이었다.
키스로 하루를 시작하고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알렉산더를 배웅한 매그너스는 잔뜩 어질러 진 로프트를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정리했다. 느긋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전에 다 못 읽은 마법서를 뒤적이면서 매그너스는 가만히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핸드폰을 곁눈질했다. 오늘도 제 연인은 바쁜 모양이었다. 일찍 올게요. 오늘따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키스와 함께 속삭이던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매그너스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녹일 겸 한동안 소홀했던 마법 약재료들을 정리하면서 부족한 재료들을 눈여겨봤다. 실리 손톱과 웨어울프의 어금니... 나중에 루시안이 오면 부탁해야겠는걸. 텅 빈 로프트의 공기를 진동소리가 갈랐다. 혹시 알렉산더인가? 들뜬 마음으로 화면을 확인하던 매그너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급하게 도착한 매그너스를 어린 섀도우헌터들이 맞이했다.
“알렉산더는?”
“방에 누워있어요.” 제이스가 굳게 닫힌 옆방을 가리켰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에 매그너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연락하지 않았어? 내가 도울 수 있었다면...”
“알렉이 원치 않았어요.” 따지듯 급하게 나간 말에 클레리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매그너스가 목 안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문을 열었다. 넓은 침대에 알렉산더가 곱게 누워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에 매그너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임무 중에 데몬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겉으로 상처가 없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깨어나질 않아서...”
상황을 설명하다가 말을 흐리는 이사벨의 어깨를 가만히 도닥였다. 걱정으로 방안에 다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클레리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매그너스는 알렉산더에게 다가갔다. 파란 마법구로 알렉산더의 몸을 천천히 확인하던 매그너스는 머리 쪽에 뭉쳐있는 오싹한 기운에 황급히 손을 거뒀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살며시 방안으로 들어온 섀도우 헌터들은 심각한 분위기에 침만 삼키면서 매그너스의 말을 기다렸다. 옆에서 느껴지는 여러 눈길을 무시하고 시선을 알렉산더에게 고정한 채 매그너스가 입을 열었다.
“세에레의 저주야.”
“세에레요?” 이사벨이 매그너스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세에레는 대가를 받고 소망하는 걸 이뤄주는 악마야. 행운을 가져다주는 악마라고도 하지”
“저주라면서요? 매그너스가 말하는 건 저주가 아니라 마치 요술 램프 지니 같은걸요.” 클레리의 물음에 매그너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에레의 능력은 오직 꿈에서만 유효해. 꿈에서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끝없이 반복하는 거지. 원래라면 아침햇살을 받으면 꿈이 끝나는 거지만.... 저주의 경우에는... 본인이 현실이 아니라고 자각하기 전에는 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저주를 풀지 못하면 알렉산더는 계속 잠을 잘 거야. 죽을 때까지.”
“그래도 무슨 저주인지 알았으니까 풀 수 있는 거죠? 그렇죠?”
“하아..... 세에레의 저주는 오직 본인만 풀 수 있어. 중간에 내가 간섭하는 것도 불가능해. 내가...할 수 있는 건 없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매그너스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
“알렉-!”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알렉산더가 뒤를 돌아봤다. 빛나는 금발이 눈앞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달려와 자신에서 어깨동무하며 매달리는 사람을 바라보며 알렉산더가 낮게 웃었다.
“제이스”
“내 파라바타이, 오늘의 주인공!”
“왜 이렇게 띄워줘?”
“그야 네가 최고니까. 오늘은 말이지.”
짓궂게 웃으며 장난을 치는 제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알렉산더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서둘러. 곧 파티가 시작이라고.”
“파티? 아아, 맞아 파티가 있었어.”
재촉하는 제이스의 발걸음을 따라 알렉산더의 발걸음이 덩달아 빨라졌다.
*
알렉산더가 잠에 빠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혹시나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라도 있을까 모든 책을 밤낮으로 뒤졌지만 도움이 될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서로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책의 내용은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파르카에의 자비’, 해결방법이라고 써놓은 구절을 씹듯이 중얼거리고 매그너스는 침대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몸을 구겨 넣었다.
세에레의 저주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소망하는 환상이 아니었다. 소망한다고 착각하는 환상들을 꿈에서 보여줄 뿐이었다. 세에레는 후회를 먹고 사는 악마였다. 먹어치운 후회를 조각조각 짜깁기해서 만든 환상을 사실인 것처럼 보여준다. 이미 무엇이 현실인지 모르는 인간들은 꿈에서 깨지 못하고 잠든 채로 천천히 굶어 죽는다. 마법으로 알렉산더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운이 좋게 본인이 저주를 푼다고 해도 잠든 시간이 긴 경우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린다.
“알렉산더...” 불안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가 떨렸다.
매그너스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알렉산더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부터 천천히 입 맞췄다. 의식을 치르듯 경건한 행위가 손등의 입맞춤으로 끝났다.
“나에게 돌아와. 제발...”
*
“그래서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오는데?”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 물어는 제이스에 알렉산더는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어디였지-? 아, 이드리스.
“다음 주에 돌아 올 거야.”
“오래도 있다 오네.”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왜 보고 싶을 것 같아?”
갑자기 튀어나간 말에 알렉산더의 눈썹이 올라갔다.
“심심하잖아.”
제이스가 손을 휘적휘적 저으면서 답을 했다. 하여튼 잘 갔다 와. 난 간다. 제이스가 사라지자 알렉산더는 손을 들어 입 주변을 매만졌다. 생각도 없던 말이 갑자기 튀어나갔다. 원래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이드리스에서 도착한 다음에 하는 게 좋을걸?”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알렉산더가 황급히 몸을 틀었다.
“이지- 뭐?”
“뭘 그렇게 놀라? 자기가 물어봐 놓곤?”
“뭘 물어봤다는-”
알렉산더는 수장실이 아닌 훈련실에 서 있었다. 기다란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이사벨이 맞은편에 있었다. 멍한 알렉산더의 반응을 무시하고 이사벨이 말을 이었다.
“둘이 그렇게 티를 냈으면 이제 사귈 때도 됐지. 더 끌지 말고 이번에 이드리스 갔다 오면 바로 고백해.”
“제이스가 좋아할까....?”
“세상에 알렉! 제이스의 반응을 봤으면서 모르겠어?”
“알겠어. 그러니까 그만 재촉해.”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떨렸다. 자꾸만 채워지는 기억과 아무 생각도 없이 튀어나오는 말들에 알렉산더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가볍게 움직이는 입술을 꾹 누르면서 알렉산더는 계속 물어보고 싶었던 물음을 어렵게 꺼냈다.
“클레리는?”
“클레리가 왜? 클레리는 제이스가 연애하면 누구보다 좋아할걸?”
“뭐-? 하지만 둘은..”
“오빠가 행복한 연애를 하겠다는데 싫어할 동생들이 어디 있겠어?”
낭랑하게 울리는 이사벨의 목소리에 알렉산더를 괴롭히던 불안감이 단번에 사라졌다. 이드리스로 길을 떠나면서 알렉산더는 제 안을 충만하게 채우는 만족감에 기분 좋게 웃었다. 우연히 바라본 오른쪽 손바닥에 손톱으로 생긴 상처들로 가득했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
로프트 소파에 뻗은 매그너스에게 카타리나가 물병을 던졌다. 제대로 받지 못했는지 아픈 신음이 들렸다.
“이러다가 너까지 쓰러지겠는 걸.”
“난 브룩클린의 하이월록이야, 카타리나.”
“하이월록이 만능은 아니지.”
짜증 내며 잠시 허우적거린 매그너스가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핏줄이 잔뜩 서 눈이 붉게 물들었다. 제 손에 있는 물은 마실 생각 안 하고 술병을 뒤적거리는 매그너스에 카타리나가 짧게 혀를 차고 가벼운 손짓으로 술병들을 치웠다.
“적당히 마셔.”
“잠이 안 와.”
“그래 보여.”
“그러니까...”
“그래도 안 돼.”
다시 소파에 누운 매그너스가 힘없이 물을 마셨다. 알렉산더가 잠든 지 보름이 지났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매그너스가 하루하루 말라갔다.
“곧 깨어날 거야.”
“세에레의 저주가 가볍지 않은 건 너도 잘 알잖아, 카타리나.”
“운명이라면서? 그럼 믿어봐. 매그너스.”
타이르는 카타리나의 말에 매그너스는 몸을 돌려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서로’가 운명인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카타리나. 긴 한숨이 소파에 눌려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랑스럽게 배웅하는 메리스와 로버트를 뒤로하고 알렉산더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더 질질 끌지 말고 고백해. 고백이라는 단어를 특히나 강조해서 말하던 이사벨을 떠올리며 알렉산더는 제이스를 생각했다. 오늘에야말로. 잔뜩 기합을 넣고 걷다가 알렉산더는 홀리듯 커다란 창에 이색의 물건들을 전시한 한 가게 앞에 섰다. 손이 허전했다. 작은 선물이라도 같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렉산더는 망설임 없이 가게에 들어갔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물건들을 모아놨는지 가게 안에 물건들이 끝없이 보였다. 가볍게 둘러보던 알렉산더는 눈에 익은 작은 물건을 들어 올렸다. 이색적인 물건에 정신을 빼앗긴 알렉산더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부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에요. 맘에 드시나요?”
“어- 저는..”
화려한 옷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안에 있는 작은 부적이 알렉산더의 악력에 사정없이 구겨졌다. 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잔뜩 갈라지고 애끓는 목소리로 알렉산더가 그의 이름을 불었다.
“-매그너스”
땅이 무너져 내렸다.
검은 구덩이로 한없이 떨어지면서 알렉산더는 목이 터져라 계속 그리워했던 이름을 불렀다. 떨어졌던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알렉산더는 계속 떨어졌다.
여기는 어딜까. 왜 계속 떨어지고 있는 거지. 끝이 있는 걸까. 사정없이 짓이겨져 작은 천 쪼가리밖에 남지 않은 부적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달빛이 너무 밝아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너무 좋아서 더 자는 척을 했다. 작게 혼잣말로 속삭이는 매그너스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마음에 새겼다. 나도 그래요. 매그너스.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내 세상이지. 당신만이 내 전부야. 그대로 눈을 뜨면 볼품 사납게 울 것 같아서 잠투정으로 당신을 찾는 척했다. 그 손길을 따라 마주 안아오던 온기를 느끼면서 가슴이 부풀어서 터질 것 같았다. 일찍 가겠다고 했는데.. 가서 당신을 끌어안고..
빠르게 떨어지던 알렉산더의 옷에 불이 붙었다. 불이 온몸으로 옮겨 붙었다. 나락 같은 깊은 어둠에 새 햐얗게 빛나는 붉은빛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
침을 삼키자 비릿한 쇠 맛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알렉산더가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아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매그너스의 로프트 천장이었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밧줄에 꽁꽁 묶인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몸에 알렉산더가 숨을 삼켰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목을 긁으면서 흘러나왔다.
“아...알렉산더!”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온기가 다가왔다. 기분 좋은, 너무나 그리운 체취가 알렉산더의 코끝을 간질였다. 목이 꽉 막혀서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는 눈동자를 굴려 매그너스를 바라봤다. 평소에 알던 모습과는 다른 매우 초췌한 모습이 눈에 가득 담겼다.
“네가...네가 돌아왔어. 네가 나한테 돌아왔어..”
20일만에 눈을 든 알렉산더에 매그너스는 상태를 확인할 생각도 못 하고 알렉산더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듯이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돌아와서 다행이야...”
“ㅁ...매그...너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알렉산더가 매그너스를 불렀다.
“내가...무슨...”
“알렉산더- 저주를 받고 잠들었다가 겨우 깨어났어. 20일이나 잠들어 있었어.”
20일이나 지났다는 말에 알렉산더의 눈동자에 당황이 깃들었다. 바람이 잔뜩 빠지는 소리로 알렉산더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내 세상이야.”
갑작스러운 고백에 매그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날.. 일찍와서 당신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어.”
"...."
"당신을 찾아 더 빨리 와야 했는데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잠긴 목으로 힘겹게 말하는 알렉산더를 바라보다가 매그너스가 손을 꽉 잡고 알렉산더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귓가를 간질이며 떨리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알렉산더가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매그너스”
“나도 마찬가지야. 내 천사.”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