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ulb님
@blueulb29
< 눈의 열쇠 >
알렉산더에게 세상은 언제나 두가지로 나뉘었다. 룰과 룰이 아닌 것. 알렉은 자신의 세상을 정확히 구분하고 있었다. 알렉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검거나 희거나. 단 두 가지 뿐 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매그너스에게 세상은 언제나 총 천연색은 아니었다. 때때로 모든 것이 그렇게 보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의 눈에서 색은 점점 빛이 바래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파티는 화려하면 할수록 더 좋았다. 매그너스의 세상이 아직 굳어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일정은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금요일에 시간맞추기가 쉬운 줄 알아?"
[이쪽도 힘들게 일정을 잡았다는 것만 알아둬. 아직 근무 중이니 짧게 끝내.]
"오케이. 그럼 나중에 봐, 라파엘."
짧은 통화를 끝내고 매그너스는 다시 한 번 일정표를 확인했다. 흠...그 유명한 라이트우드가라...저택이 끝내준다고 들었는데. 매그너스는 잡지에서 봤던 웅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떠올렸다. 화려하고 우아한 파티라, 그것도 유명한 저택에서 열린다면 금상첨화일터였다. 알렉은 화려한 파티가 내키지 않았다.
"이지, 꼭 파티를 열어야겠어?"
"오빠, 무슨 소리야? 이건 보통 파티가 아니야. 거기다 파티 플래너가 그냥 보통 사람인 줄 알아? 매그너스 베인이라고! 그 유명한! 이번에 파티 일정을 못 잡았다면 1년은 더 기다려야 했을거야. 라파엘이 그를 안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기쁨에 찬 목소리로 두 주먹을 불끈 쥔 이자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파티는 다 같은 파티 아닌가? 알렉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의 뜻이 이리 확고하다면 어차피 자신은 이지의 뜻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플래너가 누구든 자신과는 아무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매그너스는 차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파엘을 보고 짧게 손을 흔들었다. 매끄럽게 주차한 뒤 차에서 내려 매그너스는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유명한 저택이라 그런지 차고도 장난이 아니네."
"실없는 소리. 그만 두리번거리고 올라가지. 의뢰인들이 기다려."
"그 의뢰인 중 한 명은 네 [운명의 상대]란 말이지."
그간 라파엘의 빽빽했던 경호 업무 덕에 소개가 계속 늦어졌던지라 이 구두의뢰가 바로 라파엘의 약혼녀를 처음 보게 되는 자리였다. 처음 라파엘에게 약혼녀가 생겼다는 소식에 놀랐던 매그너스는 이번 기회에 그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알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지?'
갑자기 알렉의 시야가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의 붉은색 셔츠가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색도 흰색도 회색도 아닌 색. 알렉은 그를 중심으로 물감이 번지듯 색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알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세상의 모든 색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느낌에 잠시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속으로 놀란 것은 매그너스도 마찬가지였다. 라파엘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검은 머리를 가진 두 남녀가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키가 큰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매그너스는 그의 눈 색깔이 푸른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마치 동심원이 퍼져나가듯 그가 입고있는 셔츠와 넥타이의 색이 무슨 색인지 너무나 생생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예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던 그 감각. 매그너스는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잠시 눈을 감쌌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본인만 느낀 것이 아닌 듯 했다. 두 사람이 마주한 순간, 한 번 눈이 마주친 후 알렉의 표정을 봤던 매그너스는 알 수 있었다.
"오빠? 괜찮은거야?“
알렉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굴을 구겼던 인상을 풀며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자벨은 자신을 바라보는 알렉을 보며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살피려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티를 내지 못한 채 손님을 마주보고 미소를 지었다.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온 라파엘이 자신이 안내해 온 이를 소개했다.
"이쪽은 매그너스 베인.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자벨 라이트우드에요."
라파엘의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대에 찬 목소리로 이자벨이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따라와야 할 알렉의 소개가 들리지 않자 이자벨은 팔꿈치로 자신의 오빠를 쿡쿡 찔렀다. 알렉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말했다.
"...알렉산더 라이트우트"
"매그너스 베인입니다."
인사를 마친 후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라파엘은 아직 근무 중이라며 본인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이자벨은 그런 라파엘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어보였다. 곧바로 이자벨이 매그너스에 대한 찬사와 존경의 눈빛을 보내오자 매그너스는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리에 앉아 파티에 대한 컨셉과 계획을 의논하는 동안 알렉은 매그너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매그너스가 그에게 눈을 돌리면 휙 하고 고개를 피했다. 매그너스는 그런 알렉이 굉장히 귀엽게 보였다.
"..그래서 일단 파티 장소를 확인했으면 합니다. 공간이 어느정도 사용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네요."
"아, 그래요. 일단 들어온 입구부터 바로 이어지는 1층 홀을 보여드리면 되겠네요. 알렉?"
"?"
"뭐하고 있어? 안내해드려야지."
"..내가?"
얼떨떨한 표정이 알렉의 표정을 보며 이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는 눈치 챌 거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본인만 모르는 것 같았다. 매그너스가 들어오자마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을 못 떼는 모습이라니. 꼭 탐나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아주 얼굴을 뚫어버릴 것 같았다. 본인이 아는 한 처음 보이는 알렉의 반응에 이지는 이참에 아주 팍팍 밀어주기로 결심했다.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고 해도 알렉이 좋다면 오빠를 응원하기로 한 이지였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라파엘과 둘만 남은 이지는 알렉과 매그너스를 내보내며 알렉에게 살짝 윙크했다.
"알렉, 자세히 구석구석 다 안내해드려야 해! 1층 한군데도 빠짐없이, 알지?"
"이자벨양은 정말 사려 깊군요."
"이지라고 부르라니까요. 준비가 시작되면 계속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텐데 딱딱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알렉은 점점 환해지는 시야에 다시 한 번 이마를 짚었다. 생생한 색깔들이 마치 눈 안을 찌르는 것 같아 잠시 아찔해졌다.
"미스터 라이트우드, 괜찮나요? "
"아, 괜찮습니다. 잠시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매그너스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알렉은 금세 찡그렸던 얼굴을 풀며 대답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의 앞에서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1층 홀이 참 넓네요. 이쪽에 분리된 공간도 사용하실 건가요?"
"아, 그건 알아서 해주세요."
건성건성 대답하는 알렉을 보며 매그너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래봬도 이쪽은 진지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최자가 이렇게 대충이어서야. 아까 위층에서 본 여동생이 훨씬 똑부러지게 일을 진행시키겠군. 아니면 역시 그건가. "운명의 상대" 색이 보이는 걸로 봐선 확실해 보였다. 아마도 이 라이트우드가 도련님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색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특히 처음이라면 심한 두통도 동반될 테지. 색이 보이기 시작하면 일하기는 좀 더 편해지겠군. 매그너스는 핸드폰을 꺼내 홀의 곳곳을 찍었다. 일단 구체적인 컨셉을 잡은 후 이 넓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좀 더 고민해봐야 했다. 알렉은 매그너스와 함께있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매그너스가 시계를 확인하고 다음 의뢰때문에 가봐야겠다며 자신에게 인사를 건넬 때가 되어서야 아쉬움에 숨을 크게 삼켰을 뿐이었다. 매그너스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알렉은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알렉은 잠시 고민하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제이스, 한가지 물어볼 게 있어. 그..어...어떻게 알 수 있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반쪽이라는 걸?"
[이봐. 친구. 그건 순간이야. 보는 순간 알게 된다고. 난 클레리를 보는 순간 세상에 모든 것들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혹시, 너 지금 색이 보여?!]
알렉은 액자에 들어있는 제이스와 클레리의 결혼사진을 보며 말했다.
"...그래, 보여. 무척 선명하게. 네 머리가 금발인 것도. 클레리가 붉은 머리인 것도 아주 잘 보인다.."
[드디어 만난 걸 축하한다. 그래서, 누구야?]
제이스의 호기심어린 목소리에 알렉은 통화를 빨리 끝내려했다.
"신혼여행 잘 즐기고 와라. 돌아오면 맥스 환영파티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누군지 꼭 소개시켜줘야 한다.]
2층 복도에서 물어볼 게 많다는 얼굴로 이자벨이 곧장 알렉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뭔가 있었어?"
"무슨 말이야?'
"알렉!"
이자벨은 팔짱을 끼고 알렉을 올려다 보았다.
"이지 네 옷에 초록색 얼룩이 묻어있는데?"
"오, 이런! 아까 퓨레가 살짝 튄 모양...잠깐! 이게 초록색인 걸 어떻게..알렉 설마! 보여? 색이 보이는 거야?"
알렉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이자벨은 놀란 표정으로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맙소사! 그렇단 건 매그너스가 오빠의 [운명의 상대]라는 거잖아! 그런데 그냥 보냈다고?! 다음 약속을 잡던지 어떻게 해야 할 거 아냐!"
그제야 알렉은 '아' 하고 미처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듯이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알렉은 어떻게 해서든 매그너스와 더 오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 알렉은 매그너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더 빨리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자벨은 설레임과 긴장감이 떠오른 알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알렉이 어떤 상태인지 뻔히 알 것 같았다. 어휴 하고 깊은 한숨을 쉬며 이자벨이 답답하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다른 일에는 예민하고 빠릿하게 구는 오빠가 왜 이러는지...물론 더 늦기 전에 '운명의 상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라고 할 만 했다. 그런 기적을 두고 멍청하게 구는 알렉의 태도에 이자벨은 심각하게 오빠의 등짝을 한 번 차줘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답답해하는 이자벨을 보다 못한 라파엘이 알렉에게 작은 종이조각을 내밀었다. 정말 두 사람이 운명이라면 뭐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으로.
"매그너스의 주소다. 찾아갈 생각이라면 말리진 않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라파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렉은 쪽지를 낚아채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조마조마하게 알렉을 바라보던 이자벨이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은 한 번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뭐, 운명의 상대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알렉은 손 안의 주소를 확인한 후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매그너스를 보고싶었다. 쉴 새 없이 달린 알렉은 매그너스의 로프트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진정하려고 할수록 자신의 심장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은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똑똑>
"흠“
오늘은 방문할 사람이 없을 텐데. 아침에 이미 본인의 스케줄러를 확인했던 매그너스는 문간에 들리는 노크소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문을 열면서도 방문객이 누군지 몰랐던 의문가득했던 표정이 한순간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문 앞에는 한껏 어색해하는 표정의 알렉이 서있었다.
"미스터 라이트우드, 여긴 어떻게..?"
"...알렉산더라고 불러주세요."
알렉은 자신을 성으로 부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상치도 못했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매그너스를 바라보며 알렉은 자신의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무작정 끌어안고 싶어지는, 소중히 보듬고 싶어지는 어쩔 줄 모르는 감정.
알렉은 조금이라도 신중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이미 자신의 눈에는 매그너스를 중심으로 색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눈꺼풀 위의 섀도우 색부터 매끈한 피부와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색, 그가 걸친 푸른색의 가운 색깔까지. 그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매그너스는 알렉을 자신의 로프트 안으로 들이며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지 생각했다. 물론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식으로 돌진해 온 상대는 처음이었다.
과거 자신에게 넘치도록 색을 보여줬던 연인들은 사고나 병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질 때마다 다시는 색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가. 매그너스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비치는 색이 하나둘씩 줄어드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런 것은 딱히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색이 모두 보였던 적이 있었듯 그에게도 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적도 있었으니까.
"아, 혹시.."
"저..."
동시에 입에서 나온 말에 두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이야기하세요."
"먼저 말해요"
또다시 겹치는 말에 한순간 긴장되었던 공기가 사라졌다. 매그너스는 알렉을 바라보며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에 용기를 얻은 알렉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도 같은 가요? 저랑? 그러니까 그게.."
부연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한 알렉을 보며 매그너스가 말했다.
"색이요? 네, 맞아요. 지금도 점점 색이 다양해지고 있어요. 당신의 머리카락이 선명한 검은 색이라는 것도. 모든 게 아주 '잘' 보이고 있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알렉은 계속해서 매그너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넘쳤다. 매그너스를 보는 순간부터 모든 신경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자신만 바라보는 알렉의 모습을 보며 매그너스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 지 생각했다. 처음이라면 그렇겠지. 모든 게 맹목적이고. 한 사람만이 세상 전부겠지. 하지만 시간은 또 흘러갈 것이다. 매그너스, 자신만 남겨둔 채로. 그렇다면 단칼에 거절해 버리는 게 낫다. 의뢰를 받은 이상 일은 해야겠지만 의뢰인과 엮이게 되는 골치아픈 일은 없어야했다.
"알렉산더. 난 이미 색을 본 경험이 있어요. 당신은 그저 처음으로 색을 보는 것에 혼란스러워 당황했을 뿐이에요."
"매그너스, 아니에요 그게-"
"전 공적인 일에 사적인 일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그게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미스터 라이트우드, 파티의 세부사항 조정은 이자벨양과 연락해서 조율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제 사적인 공간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매그너스는 그답지 않은 딱딱한 공적인 말투로 알렉의 말을 잘랐다. 알렉은 그러는 동안에도 매그너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눈동자로 매그너스를 응시할 뿐이었다. 알렉은 매그너스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매그너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마주보는 차가운 눈동자에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매그너스의 단호한 거절에 말렉은 다채롭게 빛나던 세상의 모든 색이 다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여전히 색은 보이고 있지만 여기에 올 때까지 보였던 찬란하고 밝은 빛이 아니라 그저 어둡고 음울한 빛으로 변해있었다. 알렉은 자신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을 밀어내는 매그너스의 냉정한 태도에 마음 속 깊은 곳이 서늘해졌다.
"알렉! 어떻게 된거야?"
"그가 나를 거부했어, 이지. 나는..."
수줍게 웃으며 나갔던 오빠가 세상의 모든 절망을 끌어안은 모습으로 돌아오자 이지는 대체 무슨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곧바로 본인의 위치에 대기하고 있던 라파엘에게 눈을 돌렸다. '넌 알고있지?'하는 눈으로. 라파엘은 그런 이지의 눈짓을 받고 조용히 고개를 한 쪽으로 저어보였다. 단 둘만 이야기하자는 제스쳐에 이지는 말을 참고 알렉의 어깨를 토닥인 후 알렉의 방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라파엘? 난 매그너스가 알렉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왜 그래?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일단 매그너스와 이야기해봐야겠어. 확실해지면 알려주지."
"내일 비번이지? 꼭 연락해줘야 해!"
이자벨의 단호한 말에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로서도 매그너스가 무슨 생각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아예 짚이는 게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빠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한 표정을 짓는 이자벨을 안심시키고 라파엘은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업무가 끝난 후 당장 매그너스의 로프트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라파엘이 로프트에 도착했을 때, 매그너스는 술잔을 들고 소파에 깊게 몸을 파뭍고 있었다. 평소보다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에 돌을 던지듯 라파엘이 물었다.
"괜찮아?"
"무슨. 난 언제나 괜찮지. 좋은 술만 있다면 말야."
"그런 말이 아닌 걸 알잖아. [운명의 상대]를 밀어내는 건 미련한 짓이야."
매그너스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라파엘, 난 너무 지쳤어. 또 그에게 상처만 주고받게 되겠지."
"마지막을 생각할 바에야 지금 잡아."
"단순히 색이 보인다는 이유로..."
"어차피 그동안 진짜 <표식>이 나타난 것도 아니잖아."
라파엘은 그런 매그너스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서로가 중심이 된 관계로 변해버렸다는 게 제3자의 눈에 뻔히 보이는데. 정작 당사자 둘은 쌍방으로 삽질 중이라니. 본인들이 깨닫기 전에는 어쩔 수 없는 건가.
매그너스는 타인과 달리 어릴 적부터 색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매그너스 본인이 불멸자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에 대한 대가는 시간으로 되돌아왔다. 매그너스는 자라오면서 몇 번이나 연인을 만나고 사랑을 했다. 그럴 때마다 갖가지 색으로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이번이 꼭 마지막이라고 영원한 운명이라고 얼마나 기대했던가. 하지만 그에게서 끊어진 인연들은 언제나 다시 그의 세상을 무채색으로 만들었다. 단 한가지 매그너스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운명의 상대]를 만났을 때 나타난다는 자신의 어떤 <표식>. 진정한 운명의 상대를 만나 표식이 발현되기 전까지 그 긴 시간을 버텨야 했다.
여태까지 만난 이들 중에서 그런 표식을 나타나게 한 사람도 심지어 매그너스 자신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점점 더 포기하게 되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식>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마그네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라이트우드가 도련님을 보면서 색이 보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어차피 인연이 끊어진다면 다시 사라져버릴 색인데. 마그네스는 길고 긴 시간동안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또...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등이 따끔따끔해졌다. 매그너스는 파티의 진행때문에 종종 이렇게 저택이 들를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을 보내려고 했지만 부득불 그가 아니면 안된다고 우기는 이자벨의 고집에 불편한 마음을 한구석에 접어두었다. 어디까지나 이건 공적인 일이야. 매그너스는 마음 한구석에서 미묘하게 일어나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알렉은 매그너스가 저택이 올 때마다 저런 반응이었다.
'어쩌라는 건지...‘
매그너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집까지 찾아왔던 알렉을 거절한 후로 파티에 관한 일은 이자벨을 통해 진행했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파티장소 때문에 이렇게 저택에 가게 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조심스럽게.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알렉은 자신에게 상처받을까 다가오는 걸 두려워하고 자신은 알렉산더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하다니. 아니, 난 이미 알렉산더에게 상처를 주었던가. 사실 상처받기 싫은 건 자신이면서. 그러면서도 매그너스는 알렉의 시선과 기척을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알렉은 매그너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자신의 고백을 거절당한 날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매그너스를 놓아버릴 수 없었다. 그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알렉에게는 불가능했다. 절대로. 알렉에게는 매그너스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매그너스, 잠시만요."
"이미 이지양과 파티에 관해 협의 중입니다. 진행과정은 그녀로부터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미스터 라이트우드."
"잠시만. 잠깐이면 됩니다."
알렉의 간절한 눈빛에 매그너스는 얼굴을 굳혔다. 이렇게 질질 끌려갈수록 공과 사 두 가지가 모두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옆에서 매그너스를 바라보며 입을 떼려던 이자벨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저어보이는 라파엘을 알아챘다. 제3자가 타인의 애정사에 끼어드는 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자벨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잠깐 쉴까요? 매그너스? 차라도 한 잔 하는 건 어때요?"
이자벨의 티타임 제안에 매그너스는 잠자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번 의뢰가 끝나면 더 볼 일은 없을 것라고 생각했다. 처음 그들이 만났던 응접실에 향기로운 차향이 퍼져나갔다. 한모금 차를 마시자마자 이자벨은 잠깐 전화통화할 일이 생겼다며 일어나 라파엘과 문 밖으로 향했다.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려고 하는 행동에 매그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맞은편에 앉은 알렉은 곧은 자세로 매그너스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매그너스. 난 착각하지 않았어요."
"무슨 말이죠?"
"단순히 색이 보인다는 생각으로 당신을 찾아간 게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제 [운명의 상대]라서가 아니라-"
"그건 처음으로 색을 보았기 때문에 잠시 혼란스러워진 것 뿐 입니다. 가끔 혼란스러운 마음에 호감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요."
매그너스의 단단한 방어벽에 알렉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간절한 마음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전해야 할 것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그너스, 전 당신에게 반했어요."
"...."
알렉을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전에 매그너스의 로프트에 찾아갔을 때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말을 어떻게 해서든 전달해야만 했다. 다시 벽에 가로막힌다 해도 알렉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알렉의 단호한 고백에 매그너스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두사람 사이에 침묵만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매그너스가 가버리고 난 후 알렉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런 알렉을 발견한 이지는 당당한 태도로 알렉에게 말했다.
"알렉, 지금 뭐하는 거야? 오빠는 생각이 너무 많아. 망설이다가는 기회의 여신이 지나가버린다고."
"하지만 매그너스는..."
"고백에 아무말도 없었다고? 왜 거절했는지 물어봤어? 가서 고백에 대한 답이라도 달라고 매달려야지."
"그러다 나를 싫어하게 되면?"
이자벨은 한심하다는 듯이 알렉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좋든 싫든 일단 서로 대화를 해봐야 할 거 아냐? 뭘 망설여? 운명은 스스로 잡는 거야!"
자신보다 어리지만 믿음직한 이자벨의 충고에 알렉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매그너스의 로프트로 향했다. 늦게까지 플로리스트와 테이블과 장식에 놓일 꽃의 색과 양을 조율한 마그네스는 자신의 로프트 문 앞에 커다란 물체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알렉산더?"
"매그너스, 잠깐 얘기 좀 해요."
매그너스는 입술을 꾹 다물며 문을 열었다. 지금 거절해도 다시 찾아올 것 같은 태도였다.의외로 알렉은 포기할 줄 모르는 성격인 듯 했다. 아니, 집요한 건가. 매그너스는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장식장에서 술병을 하나 꺼냈다.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던 알렉은 매그너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와인은 괜찮-"
뒤를 돌아보자마자 소리 없이 서 있던 알렉 때문에 깜짝 놀란 매그너스는 들고있던 와인병을 떨어뜨릴 뻔 했다. 떨어지려는 와인병을 둘 다 낚아채려한 덕분에 두 사람의 손가락이 한데 얽혔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두사람의 시선이 점점 위로 이동해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 둘의 호흡이 하나로 합쳐졌다. 알렉은 자신의 손가락과 매그너스의 손가락부터 팔목, 팔뚝, 어깨와 목선을 지나 입술, 코 그리고 눈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매그너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쳤다. 심장소리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귓가에 울렸다. 그저 입을 맞춘 그 순간. 알렉에게 그 순간이 전부였다.
매그너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알렉은 마치 사냥감을 노린 매처럼 정확하게 매그너스의 눈을 바라보았고, 거침없이 매그너스에게 키스했다. 어딘지 어설픈. 하지만 강렬하고 거친 입맞춤이었다. 알렉이 매그너스의 얼굴을 좀더 끌어당기는 순간, 매그너스는 본인도 모르게 알렉의 허리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텅그렁
두사람이 쥐고 있었던 와인병이 발치에 뒹굴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매그너스는 알렉을 잠시 밀쳐냈다. 밀어내는 매그너스를 더 끌어당기려는 듯 알렉은 두 팔로 매그너스를 끌어안으려 했다.
"잠깐, 잠깐만-알렉산더"
"왜요?"
알렉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순간 알렉은 눈을 크게 뜨고 매그너스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맑은 검은 눈동자가 아닌 선명한 노란빛의 캣츠아이가 드러나 있었다. 마치 최상급의 묘안석을 보는 것 같았다.
"매그너스. 당신 눈이-."
"눈?!"
매그너스는 세면대 쪽으로 달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게 그 <표식>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알렉산더가? 매그너스는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불안해하고 실망해 온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매그너스는 세면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알렉은 착실하게 화장실 문 앞에서 매그너스를 기다렸다. 방금 보았던 매그너스의 눈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부드러웠어.
마음 속에 휘몰아치는 온갖 감정을 정리한 매그너스가 다시 문을 열고 나오자 알렉은 그의 손을 이끌고 소파에 앉혔다.
"설명을 듣고 싶어요."
알렉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요하게 매그너스를 바라봤다. 매그너스는 그런 알렉을 보며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혀끝에서 말을 골랐다. 하지만 설명은 짧았다. 자신이 불멸자라는 것. 자신에게서 <표식>을 이끌어낼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 영원히 불멸자로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라파엘 외에 누구에게 털어놓은 적 없었던 일들을 알렉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정말 당신의 [운명의 상대]라는 거군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알렉이 말했다. 매그너스는 알렉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알렉의 환한 웃음은 매그너스의 마음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도 남겨두지 않았다.
"난 이제 더 이상 불멸자가 아니야, 알렉산더."
"그럼 나와 함께 있어요. 남은 생의 모든 시간동안 매그너스, 당신과 살고 싶어요."
매그너스는 알렉의 그 말이 마치 청혼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불멸자가 아니게 되었으니 남아있는 유한한 시간동안 자신의 [운명의 상대]와 함께 죽는 것도 가능해졌다. 죽음이 가까워 온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알렉과 함께라면 삶도 죽음도 모든 것이 화려한 색으로 넘쳐날 것이다. 문득 매그너스는 알렉의 맑고 푸른 눈동자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얼굴로 가까워오는 알렉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매그너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