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님
@eeraex
< 여느 날, 두 사람 >
여닫는 소리가 달그락거리며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알렉 라이트우드는 옷장을 열고 가장 위부터 아래까지 죽 훑고는 닫았다. 다시 열어서 살피기를 반복해보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알렉은 고심 끝에 셔츠 하나를 꺼냈다.
반은 재색, 나머지 반은 재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그려진 셔츠에 팔을 꿰듯 밀어 넣었다. 소매 끝 단추를 채우면서도 거울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맨 아래 단추부터 목 끝까지 꼼꼼히 여몄다. 손길 하나를 거칠 때마다 거울에 비친 매무시를 살폈다. 어쩐지 어설픈 마무리인 듯해 목 부근의 단추를 다시 끌렀다. 채우지 않은 채로 맞붙여보다가 다시 멀어지도록 놓았다. 알렉 자신이 고집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퍽 낯간지러운 마음에 코끝을 두어 번 긁었다.
장을 닫으려다가 스친 시선이 손길을 멎게 했다. 쓰임이 분명하게 마련된 공간을 홀로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넥타이. 바로 매그너스 베인이 선물한 것이었다.
까만 바탕 위에 금색이 사선으로 수놓아진 그것은 선물한 이를 똑 닮았다.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매그너스는 알렉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이를 골랐다며 건넸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알렉은 매그너스의 의견과는 반대로, 자신보다는 그를 더 닮았다고 생각했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얇은 금사가 둘린 부분을 엄지로 문질렀다.
겨우 답을 내리나 싶었는데. 알렉은 야트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발견하지 못한 걸 뒤늦게 알아차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그를 외면하겠는가. 알렉은 종전과 반대의 순서로 하나하나 단추를 끌렀다.
정해진 루트를 밟다가도 변칙적으로 새어나가 버릴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익숙지 않다. 매사에 우위를 두어 결정하는데 그 기준점이 늘 같지 않았으며 부러 한쪽 저울판에만 여러 가지를 올려 무게를 더해보아도 천칭은 자꾸만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언제부턴가 매끈하게 포장된 길이 아닌, 울퉁불퉁하기 짝이 없는 길마저도 개의치 않게 되었는지.
무의미한 잡생각이 줄지어 이어지는 와중에도 손은 바삐 놀렸다. 알렉은 빈틈없이 색이 빼곡하게 채워진, 검정 셔츠로 갈아입었다. 가진 옷이라곤 전부 단조로운 색감뿐이지만, 알렉은 개중에서도 밝은색을 보며 망설이다가 이내 칠흑을 닮은 색을 골랐다.
알렉은 한껏 세심한 손길로 넥타이까지 둘렀다. 굳은살이 박여 투박한 손이지만 그 손길은 더없이 섬세하다. 매트한 셔츠 위로 광택 어린 넥타이가 빛을 발했다. 타이트한 블랙진에 블랙 셔츠를 걸치니 다부진 체격이 늘씬한 느낌을 주었다. 돌이켜보니 지금의 행색에, 자신의 선에 해당하는 건 몇 안 되었다. 타인의 기준에 맞추는 행위가 이례적으로 느껴져서 알렉은 밀려오는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객쩍게 넥타이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때론 복장이 자신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이사벨은 종종, 알렉의 차림새를 타박하며 소리를 높이곤 했다. 그럴 때면 알렉으로서는 별달리 보일만 한 반응이 없었기에 늘 무언으로 무시해버리곤 했다. 어설프게 대응할 바에야 침묵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알렉은 응수하지 않는 걸 택했다. 제풀에 지친 이사벨의 ‘옷 하나로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인상이 달라진다니까?’ 하는 외침에는 데몬 사냥에 옷차림이 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하고 의문을 제기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 보이지는 않았다.
유행이니 멋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알렉과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었기에 한없이 서먹하게 느껴졌으며,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느는 만큼 나름대로 그 거리를 좁혀보려 애썼다. 그런 노력이 태가 나는지 혹은 그러지 못했는지는 당장은 그리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그저 만나는 이에게 실례되지 않을 정도인가. 그것만이 알렉에겐 중대한 사항으로 남아, 움직이게 했다.
기다렸다는 듯 적절한 순간에 낮게 울리는 진동 소리가 달갑다. 알렉은 재빠르게 잠금을 풀어 알림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 응. 괜찮아. ]
화면 속 작은 말풍선에는 단 두 마디뿐이 적혀있지 않았지만, 알렉이 충분히 바라던 내용인지라 퍽 만족스러웠다.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미사여구를 나열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알렉 또한 지금 가도 되느냐는 물음 하나만 던졌으니까. 매그너스의 일정에 갑작스레 끼어든 저인데도 불구하고, 돌아온 답변은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올곧은 내용이기에 실컷 기뻐하며 알렉은 부지런히 글자를 입력했다.
[ 지금 출발할게요. ]
다시 한번 매무시를 살폈다. 거울 위로 고스란히 그리는, 입가에 걸린 웃음이며 익숙지 않은 차림새의 남자가 더없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분명 그도 그러리라. 알렉은 확신에 찬 기대를 했다. 소매를 살짝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멈추지 않고 준비를 서두른 덕분에 한결 여유로웠다. 바로 출발하기로 마음먹고 나갈 채비를 분주히 마무리한다. 서두르다가, 무심코 넣어 본 재킷 주머니 속이 허전한 걸 알아차리곤 휴대 전화를 다시 챙겨 넣었다.
입김이 그리는 궤도가 잔상을 남길 새 없이 이어졌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거리에는 추위가 앗아간 낮을 대신하듯 점등이 된 빛의 향연이 즐비했다. 알렉은 군중의 틈바구니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오가는 길, 몇 번 스치듯 눈만 굴리며 보던 가게에 들렀다. 혹시라도 밤이 긴 탓에 영업이 끝나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딸랑하고 울리는 명쾌한 종소리가 새로운 세상에 입장한 것을 환기했다. 요전부터 마음먹었던,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일을 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애인에게 선물하려고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어서 오라며 알렉을 반겼고, 말문을 어떻게 열지 고민하는 알렉을 알아차린 듯 선뜻 말을 건넨다. 직설적이고 명확한 질문에 알렉은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린다. 형형색색 만개한 다발 위로 눈만 도르륵 굴렸다. 네. 알렉은 곧이곧대로 답했다. 질문이 명료해서였을까,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일까. 어떤 망설임도, 꾸밈도 없었다.
“어떻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던가, 아니면 원하는 스타일이 있어요?”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어요. 꽃은 잘은 모르지만, 의미 있는 선물이 되었으면 해요.”
“음, 그럼… 애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요?”
순간적으로 얼굴로 열이 확 몰리는 듯했다. 알렉이 민망한 마음에 눈만 댕그랗게 뜨고 우두커니 있자 여자가 재차 물었다. 약간의 채근이 섞인 재촉에 알렉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항상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머뭇거림이 묻어난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이해했다는 듯 긍정의 표시를 보였다. 알렉이 아무리 태연한 척 잘하기로서니, 그게 당사자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타인에게 먼저 해 보이는 입장까지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게 좋겠네.”
여자가 가리킨 곳엔 보들보들하고 포근한 느낌의 다발이 있었다. 채도가 낮은 마젠타, 잘 익은 진한 살구, 맑은 날 아침의 하늘이 너울댔다. 얼핏 보기에 한 뼘이 채 모자라는 길이의 생김새가 마치 소동물의 꼬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라그라스라고 해요. 혹시 안개꽃 좋아해요?”
“네. 아니, 그 사람이 좋아하는지는 잘…….”
“애인이 뭐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그녀가 장난스레 던진 질문임을 알면서도 대답하지 못하기에 그 말이 힐난처럼 들렸다. 알렉은 다른 화제가 될 만한 걸 궁리했다.
“혹시 노란 계열로도 가능할까요?”
여자는 엷은 치자색을 띠는 라그라스를 한 웅큼 다듬어 쥐었다. 한 박자 끊어진 대화에 알렉은 나지막이 안도한다. 안개꽃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그녀가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까. 여자는 새하얀 안개꽃 다발을 펼쳐 풍성하게 만들고 틈 사이에 라그라스를 하나씩 포인트로 두었다.
“라그라스의 꽃말은 ‘당신의 친절에 감사하다’예요.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게 비단 친절 하나를 뜻하는 건 아니겠지만, 라그라스는 시들지 않으니 그 마음을 더 오래도록 전하고 간직할 수 있을 거예요.”
쉬이 보지 못했던 모양의 꽃다발이 그려지는 걸 보며 알렉은 이마저도 특별함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헤아렸다.
“안개꽃은 색마다 꽃말이 달라요. 자색 안개꽃은 깨끗한 마음을, 분홍빛 안개꽃은 기쁨의 순간을 뜻하죠. 그럼 하얀색은 무얼 뜻하는지 알아요?”
그녀가 알려주는 꽃말을 들으며 주억거리던 알렉은 아니요, 하고 답하고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죽음을 뜻해요. 그래서 의미를 담을 땐 꼭 다른 꽃이랑 함께 어우러지죠.”
지금까지 듣던 꽃말과는 현저히 다른 느낌을 주는 단어의 쓰임이 분간하기 어려웠다. 굳은 자세로 우두커니 선 알렉을 지나친 여자는 날쌔고 가벼운 움직임으로 송이가 제법 여럿 달린 꽃가지 몇 개를 들었다.
“가장 기본적으로 쓰이는 건 사랑을 뜻하는 장미예요. 영원한 사랑을 뜻하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스토크가 더 어울릴 것 같네요.”
채 열리지 않은 봉오리부터 한껏 개화한 송이가 한꺼번에 주렁주렁 열렸다. 연한 상아색 꽃잎부터 엷게 물든 연분홍빛까지가 하나이다가도 여러 개인 꽃을, 여자는 먼저 쥐고 있던 다발 속에 빠른 놀림으로 녹아들게 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죽음을 만나면 영원한 사랑이 되죠. 보기에도 예쁜 꽃이 뜻까지 예쁘면 얼마나 특별해요.”
각각의 꽃이 만나서 두 단어의 조화로 만들어내는 문장만큼 특별한 게 어디 있을까. 예쁜 것은 외관이 아닌, 그 안에 품은 말이라는 점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말로 건네지 못하는 마음을 정성스레 꾸민다. 매그너스가 알아차릴까. 짐작할 수 없지만, 그저 전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알렉은 흡족한 얼굴로 그대로 만들어달라고 말했고, 여자가 투명한 포장지부터 크라프트지로 꾸밈을 마무리할 때까지 얼굴에 서린 웃음은 가시지 않았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알렉은 자신도 마법을 쓸 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깜짝 선물이랍시고 숨기는 게 고작 등 뒤가 전부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알렉산더.”
낮은 숨을 따라 울리는 제 이름이 좋았다. 알렉은 언제 아쉬운 얼굴을 했냐는 듯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에 화답하듯 매그너스는 알렉이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한쪽으로 비켜섰다. 한쪽 팔을 뒤로 뺀 터라 동작이 엉거주춤했고 그 모습에 매그너스의 눈길이 닿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들어갈 때까지고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시선의 향방을 알아차린 이상 마냥 미룬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렉은 엉긴 팔을 제 위치에 두어 손에 든 것을 꺼내보였다. 어설픈 손놀림이 수반되었다.
“선물이에요.”
매그너스는 말이 없었다. 오는 내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고 이런저런 기대도 해보았지만, 가만히 서 아무런 응대도 돌아오지 않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터라 알렉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알렉이 팔을 뻗어 꽃다발을 건네자 반사작용처럼 맞은편에서 이를 받아들기 위해 두 팔이 마중한다.
“매그너스?”
안아 들고도, 매그너스는 말이 없었다.
“…고마워.”
의중을 알 수 없어 샘솟기 시작한 불안이 단숨에 사그라든다. 움푹 패는 양 볼이 이를 반증했다. 현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걸 깨닫고는 매그너스를 이끌고 거실로 향했다. 매그너스를 기다란 카우치에 앉히고 알렉 자신은 그 건너편에 앉았다. 매그너스는 품에 안은 꽃다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진작 선물할 걸 그랬다. 꽃집이라는 낯선 공간도 기꺼이 방문할 텐데. 알렉은 뒤늦게 자책했다.
테이블 위의 장식을 바꾸는 것은 매그너스의 즐거움이어서 알렉이 올 때마다 달라지곤 했는데, 이번에는 육각의 철제 장식 안에 전구가 든 모양새의 조명이었다. 딱, 하고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 팔을 웅크린 매그너스가 품에서 한 손을 꺼내며 낸 소리였다. 소리는 다시 한번 더 이어지고, 빈자리에는 투명하고 둥근 볼처럼 생긴 화병이 놓였다. 그 모양은 어항과도 닮아서 적당한 높이로 채워진 물이 금방이라도 크게 울렁일 것 같았다.
매그너스는 아주 조용한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단정한 리본으로 매듭지어진 가죽끈을 푸르고 안에 담긴 꽃을 차례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무성한 안개꽃부터 스토크까지 화병 안으로 담고, 남은 라그라스로는 작은 다발을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은 빠르고 고요하게 진행되었고,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듯해 알렉은 매그너스의 동작 하나하나를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그만.”
알렉을 등지고 선 매그너스가 뒤를 돌아 미안한 뜻을 내비치고, 알렉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고 더욱 환하게 헤살거렸다. 알렉은, 화분과 나란히 한 매그너스를 눈에 담았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이를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서.
“좋아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정말 기쁘네.”
“꽃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미처 몰랐어요.”
“좋지. 알렉산더 네가 주었다는 사실이 더 크지만 말이야.”
말에도 마법이 깃들 수 있는 걸까. 알렉은 더없이 들뜨는 마음이, 자신의 휘하에서 벗어나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 고민한다. 매그너스의 말 하나로도 통제를 잃는 건 그가 타인을 대하는 노련함 탓인 걸까. 아니면 그를 핑계로 삼을 정도로 제어하지 못하고 끌리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걸까. 아무렴 좋았다. 몸을 일으키자 알렉을 따라 움푹 팬 것이 다시금 제자리를 잡는다. 몇 발짝 떨어진 매그너스에게 다가섰다. 낮게 내리던 시선이 알렉의 움직임을 따라 오르고, 알렉은 시선의 끝이 고정된 것을 알아차리고 옭아매듯 입술을 맞댔다. 고개를 살짝 숙여 가까이하면 바로 마주 닿아오는 입술이 좋았다. 입안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열꽃을 전하려는데 매그너스가 슬쩍 물러섰다.
“알렉산더, 손…….”
“아, 미안해요.”
끊어진 흐름을 향한 의아함은 매그너스의 지적으로 오래 가지 않았다.
하지 않으려 의식하지만 행동이 앞섰다. 다가오는 게 좋답시고 확 끌어당기려는 심산이었다. 습관처럼 매그너스의 셔츠 깃을 붙들어버렸다.
“애써 차려입은 건데 다 구겨져버렸네.”
아쉬움을 함빡 담은 말은 장난스레 이어졌다. 매그너스는 한 손으로 알렉의 볼을 쓰다듬었다. 마치 달래는 듯 그런 행동은 몇 번 더 이어졌다.
“어차피 벗을 거니까 괜찮아.”
매그너스는 알렉의 당찬 발언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떨어냈다. 매그너스의 반응이야 어떻든 알렉은 하던 일을 마저 하겠다는 기세로 자신의 손으로 구겨진 깃 사이의 첫 단추부터 하나씩 풀어냈고 알렉의 손이 가슴 언저리를 지나갈 무렵 매그너스는 이를 또 막아섰다. 이번에는 손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내가 준 넥타이 했네.”
“네.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돼요?”
몸이 달아서 더 바짝 붙어오는 알렉에게 매그너스는 짐짓 태연한 척 자신이 왜 넥타이를 선물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알렉은 매그너스가 세운 손 위로 제 손을 겹치고는 느릿한 동작으로 깍지를 꼈다. 당장이라도 입술부터 부딪치려 들던 기세가 확 꺾인 이유를 알기에 매그너스는 그 귀여운 행동으로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입은 맞추고 싶은데 셔츠 깃을 부여잡는 것은 금지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왜 이렇게 쩔쩔 매?”
매그너스는 알렉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그대로 한발 두발 앞으로 나아갔다. 매그너스의 발에 맞춰 알렉은 서서히 뒷걸음질 치고 매그너스는 원하는 만큼 이동한 후에야 손을 힘주어 밀어 그대로 알렉을 소파에 앉혔다. 조금 전의 모양새를 닮았지만, 철저히 반대의 상황이다. 이번에는 매그너스가 알렉을 내려다보았다. 매그너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매그너스는 시선은 알렉에게 고정한 채로 알렉의 뒷덜미를 살살 쓰다듬었다. 매만지는 것에 반응하듯 긴장한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알렉의 손은 역시나 갈 길을 잃은 그대로이다.
그렇게나 입을 맞추고 살을 맞대보아도 알렉의 속도는 느렸다. 마치 처음 무언가를 배우는 이처럼 더없이 조심스러운 이 학생은, 가르치는 이의 순서만을 따랐다. 그래서 놓치기 싫어 붙잡으면서도 그 너머까지는 알지 못했다.
“나 어디 안 가니까.”
한 손은 쓰다듬는 그대로, 다른 손은 볼을 그러쥐며 입술을 맞댔다. 가만히 앉아서 우두커니 매그너스만을 응시하는 알렉에게 새로운 걸 알려주는 것처럼 그렇게. 마주한 입가에 웃음기가 너울대는 것이 선연했다.
“지금 하고 싶어요.”
“배 안 고파?”
“나중에 와플 만들어 먹어요.”
온도를 잃은 열기가 다시 점화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거절이 속하지 않은 대답에, 알렉은 품안의 매그너스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이동한다. 매그너스는 문득, 스태미너 룬을 그린 애인은 이래서 위험한 건가, 하고 드물게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성실한 애인은 도화선에 불이 붙으면 퍽 우등생이 되었다. 매그너스의 생각이야 어떻든, 알렉은 제 본의에 충실했다. 단단히 안은 매그너스를 침대 위로 뉠 때까지.
잠든 매그너스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여 알렉은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채 맞물리지 않은 커튼 자락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고스란히 매그너스의 얼굴 위를 물들였다. 알렉은 가만히 누워 매그너스의 낮은 숨소리가 고요한 방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온화한 휴지기에 들어간 매그너스를 멀거니 지켜보기도, 손을 뻗어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기도 했다.
심심함을 어떻게 떨쳐낼까 따져보다가, 이내 무얼 먹을지를 고민한다. 와플을 입에 담았다지만 말로는 뭔들 못 만들까. 매그너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지부에서도 요리 담당은 따로 있었고 순번이 돌았지만 그 안에서 알렉은 늘 열외였다. 눈치껏 부수적인 일이라도 하면 되지 않으려나. 알렉은 잠든 이가 깨지 않도록 가장 작은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을 찾으려 연 냉장고 안을 확인하고 곧장 닫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잘못 고른듯했다. 빼곡히 자리한, 알록달록한 병이 용도를 짐작게 했다. 지척에 있는 허리춤에 올 법한 높이의 다른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냈다. 병 하나를 거뜬히 비우고 나서야 갈증이 해소되었다. 닫지 않은 채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어림잡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알렉이 손대볼 만한 재료가 있었다. 달걀 요리는 할 수 있었다. 알렉은 내심 안도했다. 매그너스가 담백하게 구운 와플에, 보들보들한 스크램블드에그도 곁들이고 갓 내린 커피도 함께하면 좋겠지. 알렉은 그 위에 메이플 시럽을 잔뜩 뿌리는 것으로 가늠을 가벼이 마무리했다.
달걀 일곱 개를 꺼내어 두고, 커다란 볼부터 소금, 올리브유, 파슬리 가루를 잔뜩 나열하고는 원두를 내릴 준비를 했다. 이런 과정이 낯선 알렉의 행동이 자꾸만 더뎌졌다. 토독토독 방울이 연이어 내리는 소리 위로 익숙하고 버석한 걸음 소리가 뛰어든다.
“잘 잤어?”
알렉이 묻자, 답을 대신하듯 발뒤꿈치를 슬쩍 들고 짧게 입 맞춘다.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나른하게 치대오는 매그너스가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었다.
“눈 뜨자마자 바로 봤으면 더 환상적인 아침이었을 거야.”
“나만 환상적인 아침이었네요.”
“그렇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네.”
기합이 덜 들어간 차림의 매그너스도 이제는 익숙하다. 알렉은 한껏 멋을 낸 매그너스도 좋지만 허술함이 잔뜩 어린 쪽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견주는 것은 어느 한쪽에 우위를 두기 위함이 아니었지만, 다른 이가 모르는 모습을 안다는 것은 타인에게 비출 수 없는 우월감이 자라나게 했다.
한시적인 휴식에 종지부를 채 찍지 못한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둥글다. 알렉은 조심스레 양 볼을 감싸 쥐었다. 두 손을 펴면 완전히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아, 어떻게 어루만져도 손이 자꾸만 빠져나갔다. 알렉은 호선을 그리는 입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왜 웃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뭐 만들려고 했어?”
“스크램블드에그요.”
“그거 좋은데.”
매그너스는 알렉의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주었다. 알렉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아쉬움에 쉬이 돌아서질 못했다. 유연한 손놀림 위로 반짝하고 꽃 한 송이가 모습을 보였다. 매그너스는 이를 고고하게 잡고는 알렉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라넌큘러스. 너랑 어울릴 것 같아서.”
얼떨결에 받아든 꽃은 그 중심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잎으로 휘감겨 풍성했다. 여린 잎 더미는 그 안의 고집쟁이 어린 봉오리를 숨기는 견고한 성벽 같았다.
“네 마음에 대한 대답이야.”
“마음?”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연인에게 나도 이 정도 선물은 해야겠지.”
“……잘 간직할게요.”
열이 홧홧하게 오른 얼굴을 숨기고 싶다. 보지 않아도 벌겋게 달아올랐으리란 건 알 수 있다. 꽃에 무지한 알렉이지만, 매그너스의 것을 고르며 여러 가지를 들었기에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는 알았다. 또, 매그너스가 자신의 선물의 의미를 알아차렸다는 것도. 입술이 바짝 마르는 듯해 알렉은 마른 침을 삼켰다.
“다녀올게요.”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은 그 주위만 맴돌다가 매그너스의 반응이 한 박자 늦자 그제야 곧게 마주한다. 눈가가 살짝 접히고 웃음기를 함빡 머금은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쑥스러움이 가셨다.
“응. 잘 다녀와.”
알렉이 먼저 등을 돌린다. 매그너스의 집을 나설 때면 늘 알렉이 문을 닫는 거로 마무리했던 지난날과 달리.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매그너스와 멀어져간다. 물리적인 거리는 알렉의 노력으로도 좁힐 수 없어 언제나 지부로 돌아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다시 오겠다는 말밖에 건넬 수 없지만, 이를 이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여 주는 이가 다시금 마음에 꽉 들어찬다. 고마움이 크기를 키워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닌 데도. 마음 한구석에서 자라나기 시작하는 마음이 몸 전체를 잠식해나가는 걸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
알렉은 손에 든 꽃에 시선을 준다. 대체 누가 누구더러 하는 말인지. 완패(完敗)였다. 언제나 받기만 하는 위치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에 설욕하고 싶던 마음이 있었다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패할 줄이야. 아직도 매그너스의 마음 씀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다는 것만 확인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건 그것대로 또 어떤가. 방향키를 고쳐 잡았으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기쁘게 고민하고 생각할 것이다. 온전히 전할 때까지. 알렉은 좀 더 큰 보폭으로 걸었다. 하루라는 이름의 바퀴를 빠르게 굴려, 지나온 길 위를 다시 걸을 시간이 더욱 앞당겨지기를 바라며.
Fin.
라넌큘러스의 꽃말은 “당신은 매력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