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삐님
@casbucky5
< 검은 고양이 >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으으. 알렉산더는 잠시 쉴 겸 찌뿌둥한 몸을 쭉 피고 기지개를 폈다. 역시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업무만 보는 것은 저와 맞지 않았다. 목을 양옆으로 돌리자 당연하게 뚜둑하고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매일 아침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와도 현장에서 직접 몸을 움직이며 일을 하던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다가 아래를 보았다. 붕대를 감아 고정해둔 오른쪽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일이었다. 팀을 짜서 두 마리의 데몬을 처치하던 중 한 마리가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다행이도 그간 훈련을 통해 단련된 기술이 있어 바로 데몬을 처리했지만 데몬이 죽어가면서 다리에 독을 뿜어낸 게 문제였다. 치명적인 독이 아니기 때문에 룬으로 대부분의 치료가 가능했어도 네피림들에게 상극인 독이라 당분간은 이렇게 앉아서 업무를 보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은 월록을 부른다면 쉽게 치유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데몬의 독이니 나름대로 같은 피가 섞인 월록이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고작 이런 일 때문에 클레이브의 자원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방심해서 일어난 일이다. 제이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실력으로 임무 중 한눈을 파다니.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메리스와 로버트가 한심하게 바라볼 모습이 눈에 선했다. 명예의 훈장은커녕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상처일 뿐이다. 지금도 누가 제 다리를 보는 게 두려워 다른 헌터들이 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따라 나가지 못했다.
이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알렉산더는 마음을 다잡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야옹.
...뭐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곁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이미 이곳에 없었다. 투병한 벽 너머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 보이지만 철저한 방음으로 그들의 목소리가 안까지 흘러 들어오진 않았다.
다시 귀를 기울였다. 착각이 아니라면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이곳에 짧은 시간동안 일하면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최악의 상황으로는 누군가 인스티튜트에 침입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에 꽉 쥐고 있는 손바닥이 점점 축축해졌다.
“으악!!!”
다리에 붙은 검정색 물체를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물러서다 의자와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이제는 바닥에서 이상한 자세로 누워 있는 알렉산더를 향해 검은색 물체가 사뿐히 발걸음을 떼며 다가왔다.
“어......고양, 이?”
“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평범한 검은 고양이였다. 반짝거리는 노란 눈동자가 사르르 감기고 붕대가 감겨있는 알렉산더의 오른쪽 다리에 제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고양아,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어떻게 평범한 고양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해준 것 없이도 애교가 많은 고양이를 내칠 정도로 알렉산더는 모질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꽤 사람 손길을 탄 것인지 버둥거림도 없이 얌전했다. 분명 길을 잃고 떠돌아다니다 우연히 들어왔겠지. 여러 가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검은색 옷을 입길 잘했다고 생각해 본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양이의 털색과 비슷해서 약간 움츠리고 있으면 감쪽같았다. 다행이도 눈에 띄지 않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제 갈 시간이야.”
바닥으로 조심히 내려놓았다. 검은 고양이는 아직 떠날 마음이 없는 건지 알렉산더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몸을 붙였다. 그냥 모른 척 가버렸어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텐데.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모르다가 결국 몸을 숙여 고양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미안. 내가 평범한 먼데인이라면 널 키웠을 텐데.”
“야옹.”
마치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 같은 울음소리에 알렉산더는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마음 같아선 이 고양이와 더 놀아주고 싶었지만 알렉산더는 해야 될 일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길게 쓰다듬어주고 몸을 일으켰다.
“난 이만 가야 돼.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만났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그 보석 같은 노란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치게 된다면 마음이 흔들리게 될까봐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낯선 고양이에게 너무 마음을 주는 것도 이상했다. 잘 선택 한 거야. 알렉산더는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알렉!”
다시 인스티튜트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 익숙한 이와 마주쳤다. 이자벨이다. 평소와 다르게 올려 묶은 머리가 어깨선을 타고 흐트러졌다. 저를 발견하고 뛰어온 것 같았다. 방금 전 일 때문에 우울하던 얼굴에 조금 생기가 피어올랐다.
“임무야?”
“응, 데몬이 나타났다고 해서 나가는 중이야. 그런데...”
밝게 얘기하던 이자벨이 한순간에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했던 알렉산더도 이자벨의 내려간 시선을 발견하곤 깨달았다. 아, 다리. 가족을 너무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은 자신보다 제 몸을 더 걱정했다. 금방 쏟아져 나올 걱정 어린 말들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지만 이자벨이 더 빨랐다.
“세상에! 다 나은 거야?”
“나는 괜찮...,어?”
이자벨은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알렉산더를 껴안았다. 몸집때문에 오히려 이자벨이 품에 안긴 모양새였지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실없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이사벨이 곁에서 떨어지자마자 다리를 확인했다. 다리에 감긴 붕대는 물론이고 서있을 때마다 자잘하게 느껴지던 고통도 사라져있었다. 이자벨이 잘되었다며 다음에는 같이 나갈 수 있겠다고 기쁜 목소리로 말해도 알렉산더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매그너스?”
잔뜩 들뜬 목소리는 이름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아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오늘은 정말 끔찍한 날이었다. 이름도 잘 모르겠는 헌터 한명이 보고서를 잘못 써오고 월록을 비하하는 내용이 담긴 대화중인 무리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심지어 클레이브에선 아직도 매그너스와 교제중인지 사람을 보내 확인까지 하고 갔다. 이러다간 정말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제이스에게 뒷일을 맡기고 매그너스의 로프트로 뛰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정작 그 대상이 보이지 않으니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매그너스가 한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더욱더 우울해졌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매그너스가 없더라도 이곳이 좋았다. 공기 중에 섞여있는 제 향과 매그너스의 향이 익숙하게 어우러져있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향이 더 깊게 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알렉산더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침실까지 고양이를 들인 적은 없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고급스런 빨간 침구위에 누워있는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는 평소에 매그너스가 돌보던 아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윤기가 흐를 정도로 정돈이 잘 되어있는 털과 둥글게 말고 있는 몸집이 너무나 익숙했다. 분명 그 아이다.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기억 저 편에 밀어 넣고 잊은 척 했는데. 부질없는 짓이다. 막상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만져도 괜찮겠지. 아무도 허락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알렉산더는 스스로 납득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조그마한 숨소리가 느껴지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냐.”
최대한 잠에서 깨지 않도록 쓰다듬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미약한 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작게 사과를 하고 손을 떼려 했지만 머리를 부비는 몸짓에 떨어질 수 있을 리 없었다. 꼭 닫혀있던 눈이 살며시 열렸다. 이 귀여운 고양이는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노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매그너스처럼.
알렉산더와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그걸 알렉산더가 알 수 있는 이유는 눈앞에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매그너스?”
둘 다 당혹감에 침묵이 흐르고 조금 뒤 알렉산더가 첫마디를 내뱉었다. 매그너스는 아직도 머릿속에서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정리중 인 것 같았다. 아마도 과거의 일을 생각하고 있겠지.
그 검은 고양이와 매그너스가 같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되자 오히려 알렉산더의 마음은 차분해졌다. 소중한 것이 둘에서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화가 나기 보단 화려한 언변술사로 유명한 매그너스가 자신보다 많은 세월을 살고도 비밀 하나를 들킨 것 때문에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저기, 그러니까, 알렉산더?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음, 싫어요.”
자신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한 매그너스가 너무 가여워서 농담이라고 도닥여줄 뻔했지만 그래도 조금 괘씸한 부분이 있기에 헛기침을 하며 시간을 끌고 심각하게 목소리를 깐 채로 말했다.
“침대위로 올라와서 말한다면 들어줄게요.”
만약 귀가 있었다면 축 처져있을 꺼라 확신할 수 있는 얼굴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바뀌더니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내 천사가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아진 거지?”
“다 당신한테서 배웠죠.”
Fin.